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

저   자
김원
출판사
이매진
가   격
35000
출판일
2005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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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정보


■ 책 소개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의역사를 깊고 넓게 조망하는 책. 1970년대 성장의 그늘에는 "식모"와 "공순이"로 상징되는 여성노동자들이 살고 있었다. 식모나 버스 차장 같은직업을 전전하다 숨이 턱턱 막히는 다락방이나 닭장을 닮은 공장에서 약을 먹어가며 고된 노동에 시달리던 농촌 출신 하층 여성들.

 


1970년대에 태어난 저자는 기존의 남성노동자 중심의 노동자 서술을 거부하고 지배적 담론에가려진 절반의 여성들을 전면에 내세웠다. 민주노조운동의 "신화", 희생양으로서의 "여공", 전투적 노동운동을 둘러싼 남성 지배 담론, 종교단체와여성노동자간의 숨겨진 비밀들, 여공의 문화 등 다양한 주제를 통해 저자는 국가, 자본, 그리고 남성 노동자에 의해 왜곡되고 은폐되어 온 여공을현대사의 또 다른 주체로 복원했다. 또 신문의 가십, 식모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르포와 수기, 공장 배치도, 노래 가사 등 그간 가치가 없다고여겨지던 사료를 통해 여공에 대한 지배적 지식의 ‘틈새’를 파고들었다. 기존 노동사에 긍정적 균열을 내는 새로운 노동운동사라 할 만하다.


■ 저자 김원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나서강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 뒤,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대학원 석사와 박사를 졸업했다. 문화연구 시월 회원, 한국정치연구회 연구위원,리츠메이칸대학 외국인 객원연구원, (사)민주화기념사업회 총서발간사업 공동연구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제2기 보고서 공동 집필자, 서강대,한림대, 상지대 강사를 거쳐 현재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로 있다. 


■ 차례
프롤로그 ― 나와 노동자연구


1장 식모는 위험했나? ― 산업화 시기 주변부 여성노동을 둘러싼 담론들
2장 공장을들여다보니 ― 여성들은 어떻게 공장에 들어갔나?
3장 공장과 다락방 ― 산업화 시기 공장 들여다 보기
4장 힘세고 건강한 소녀들 ―"여성노동"과 성별분업
5장 산업전사 ― 민족과 국가가 부른 여성노동자들
6장 계집들이 노조를 만든다고! ― 여성들의 노조만들기
7장 여공들은 "투사"였나? ― 민주노조 신화 "뒤집어 보기"
8장 교회는 여공들의 친구였나? ― 교회단체의 빛과그림자
9장 자매애는 강했다 ― 여공들의 소모임 만들기
10장 공순이, 타락했냐? ―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시선
11장남진, 나훈아에 열광했던 여성노동자들 ― 여공의 문화


에필로그 ― 그녀들의 세계를 본뒤
참고문헌




도서요약

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


식모는 위험했나? - 산업화 시기 주변부 여성노동을 둘러싼 담론들


식모 : 그들은 누구였는가?

당시 어느 정도 사는 집에 젊은 혹은 조금 나이든 식모들을 찾아보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미혼 여성들이 대규모로 이농한 결과, 서울시 전체 가구의 31.4%가 가정부(식모)를 두고 있었으며, 그 수가 무려 24만6천 명으로 추산될 정도였다. 그렇다면 당시 도시로 올라온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1960년대 근대화 시기 서울로 이동했던 인구 가운데 가족 단위가 아닌 ‘단독’으로 상경한 사람들 대부분은 29세 미만의 미혼 남녀들이었다. 특히 혼자 서울로 온 여성 인구의 절반 정도는 15~19세의 어린 소녀들이었다. 당시 서울시 부녀 과에서 조사한 상경 여성들에 대한조사를 보면 대다수가 국민학교 졸업 정도의 저학력이었다. 특별한 기술도 없고, 가사노동 외에 손에 익은 것이 없는 이들에게 식모살이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식모들은 고용자에게 노동력 외에 신체, 인격마저도 저당 잡히는 존재였다. 식모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는 임금이나 노동 조건만이 아니었다. 식모들은 가족 내 구성원이라기보다 ‘이질적인 존재’로 간주되었다. 분명한 계약 관계에 의해 고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식모들이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은 이유는 산업화 시기 ‘부녀 정책’ - 지금의 여성 정책 - 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산업화 시기 부녀 보호 정책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보호 대상인 요보호 여성의 위치와 실태에 대한 체계적인 인식이 결여된 점과 이 여성들 대부분을 경제?가정적으로 불우하고 주변적인 여성집단, 다시 말해 모자 가정이나 윤락여성으로 규정했다는 점이다. 주변부 여성들은 보호의 대상이라기보다 선도가 불가능한 대상으로 여겨졌다. 이처럼 농촌 출신 하층여성들은 국가와 사회로 보호받지 못한 채 식모, 여차장 등의 경로를 거치면서 공장에 취직했다. 그러나 이것도 여의치 않으면 이른바 ’호스티스‘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식모는 위험하다’ : 주변부 여성 노동에 대한 담론들
김기영의 문제작 〈하녀〉에서 드러나듯이 산업화 시기 ‘식모’ 등 도시 하층 사회의 여성은 금지되고 억압된 욕망의 대상인 동시에 가정의 통제에서 벗어난 비정상적인 ‘타자’로 여겨졌다. 당시 한 연구에 따르면 “이들은(식모들) 항상 사회 문제화 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실제로 윤락 여성 가운데 상당수가 가정부였다는 통계가 발표되기도 했다. 또한 ”가정부의 수효가 증가함에 따라 절도, 유괴, 치정 등 소위 ‘식모 공해’라는 새로운 말이 생겨날 정도로 가정 생활을 파괴하고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 많아졌다“라는 표현이 사용될 정도였다. 식모에 의한 범죄는 경찰 집계(1965년 3월~66년 2월)에 따르면 절도(560건), 유괴(30건) 등이었으며, 구체적인 범죄를 유형화한 것을 보면 살인한 식모, 아기를 업고 간 식모, 도둑질한 식모, 살림을 들어먹은 식모 등으로 보도되었다. 범죄에 대한 원인 진단은 특기할 만한데, 사건의 내면에 숨겨진 가정 내 식모에 대한 비인간적인 대우 등에 주목하기보다 ”그들의 범죄는 무지와 이에 따른 허영이나 즉흥적인 감정에서 출발“한다고 해석되었다. 이는 식모만이 아니라 버스 여차장 누나, 사환 누나, 술집에 다니는 여성들을 포함한 하층 사회의 가난한 여성들에게도 적용되었다.


핵가족 이데올로기와 근대적 모성
5?16 군사 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은 경제 성장을 위해 낙후된 과거의 타성을 버리고 근대적이고 선진적인 가치를 도입하는 것을 중시했으며, 근대적 가치는 곧 계획성, 계산 가능성, 효율성 등으로 표상되었다. 그 대표적인 정책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가족 계획과 피임약 보급 등의 조치였다. 이와 동시에 강조된 것은 이른바 ‘핵 가족론’이었다. 아메리카 핵가족이 가족 임금과 이를 보장하는 생산성 협약, 가정의 재정의 등 제도적 장치를 통해 안정화된 반면, 한국의 경우 가족 구성원의 복지 및 보호 기능은 ‘가족의 책임’이라는 전통적인 가족 이데올로기를 유지하는 ‘선 가족 후 복지’가 강조되었다. 특히 1960년대 이래 강력하게 추진된 산업화 정책은 자본 축적의 극대화를 위한 성장 제일주의에 따라 국가복지를 사실상 방기했다. ‘가족 임금’이란 ‘규범’이 전체 노동 계급으로 확산된 아메리카와 상이하게 한국은 중산층과 노동자 계급 상층에서만 가족 임금이 발견되었다. 이념형으로 가족 임금은 노동자 가족에게는 실제로 적용이 불가능한 범주였으며, 대부분 저임금 여성 노동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했다. 결국 이것은 모성으로서 여성의 희생을 담보로 노동력 재생산을 가족에 전가하는 정책에 다름이 아니었다.


산업화 시기 가족은 사회 문제를 예방하는 기능을 해야 하며, 좀더 확대해 해석한다면 모든 사회적 부작용을 가족, 더 정확하게 ‘가족 내 여성’에게 전가하는 효과를 낳았다. 한마디로 말해 가족 내부 여성의 역할이 가정 내부 감정 노동, 전문적인 자녀 교육 등으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이는 197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중산층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핵가족’ 이데올로기의 전면화라고 해석할 수 있다.


식모 폐지론을 둘러싼 담론
중산층 가족 내 과학적 모성, 자녀 육아 등의 이데올로기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제기된 것이 식모 폐지론이었다. 1960년대 들어서 ‘가사노동의 조력자’에서 ‘과학적이고 근대적 가족 형성의 방해물’로 식모의 의미가 옮겨간 것이다. 더 나아가 지배 담론들은 식모의 존재를 핵가족에서 전업주부가 맡아야만 하는 중요한 역할인 자녀의 양육과 교육 등과 연결시켜 사고했다. 특히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식모들에게 가족의 영향을 맡기는 것은 과학적 모성과 근대적 모성 형성에 있어서 커다란 문제로 지적되었다. 식모 폐지론이 식모라는 가사보조 노동력의 존재를 둘러싼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전통적인 의미의 가족 내 성별 위계구조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중산층 여성들은 자녀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적 모성으로 스스로를 주체화시켜야 한다는 방향으로 귀결된다.



공장과 다락방 - 산업화 시기 공장 들여다 보기


다락방 담론과 공장 동경

산업화 시기 공장 담론 가운데 제일 유명했던 것은 ‘다락방 담론’이었다. 전태일의 분신으로 유명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고단한 일상을 상징했던 것이 다락방이다. 다락방 담론이 지닌 내용은 여러 가지이지만 여성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조건, 다락방을 통한 여성노동자, 특히 시다(미싱사 보조)에 대한 경제?신체적 착취 등이 대표적이다.


다락방은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평화시장 일대 여공들의 현실을 반영하는 담론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평화시장 아가씨들은 3년만 고생하면 고물이 된다.’는 말이었다. 이처럼 악명 높은 다락방은 거의 모든 공장에 존재했었다. 전태일과 삼동회 동료들은 이미 20여년 전에 평화시장의 노동조건을 조사했는데 그 문서가 바로 「평화시장 근로 조건 실태조사」(1970)이다. 이에 따르면 공장의 전체 ‘윤곽’은 다음과 같다. “현대식 3층 건물로서 1층은 점포, 2?3층은 공장임. 10,000명 이상을 수용하는 건물이면서도 환기장치가 하나도 없으며, 더구나 휴식시간 오후 1시부터 2시까지 햇볕을 받을 장소가 없음.” 그리고 평화시장의 좁은 공간을 상징하는 ‘다락’은 평균 1.6m 정도로 매우 낮았음을 알 수 있다. 좁은 곳은 1평 반, 넓은 곳은 12평의 협소한 공간에서 작업하고 있었다. 이 좁은 공간에서 20~30명이 모여 작업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겨울에는 춥고 발이 너무 시려 동상에 걸리는 여성노동자들이 많았다. 다락방 가운데에 난로 한 개 정도를 놓아주지만, 대부분 연탄난로였기 때문에 방 전체를 데우기는 어려웠다. 여름에는 좁은 공간에서 땀 범벅이 되어서 일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하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는 환기였다. 먼지가 빠져나갈 구멍은 물론이고 환풍기조차 없었다. 그리고 평화시장에서 화장실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20~30명이 줄을 서서 30분 정도를 기다려야 했다. 시다들은 작업 도중에 다락에서 일어서지 못하는데다가 생리 현상마저 편하게 처리할 수 없었다.


소녀들의 ‘공장 동경’
그렇다면 앞에서 살펴본 다락방에 관한 담론이 과연 모든 공장에 해당되는 것이었을까? 나는 이것에 대해 부정적이다. 이런 설명만으론 왜 여성노동자들이 그토록 공장에 들어가길 갈망했는지에 대해 알 수 없다. 과연 다락방 담론은 여공들의 공통된 조건이었을까? 여기서 주목할 점은 산업화 시기 작업장을 형상화한 ‘다락방 담론’은 절반의 진실이었다는 것이다. 동일방직처럼 적어도 민주노조가 존재했던 상당수 작업장에서 다락방 담론은 전형적인 것이 아니었다.


다락방 담론의 가정과 달리 산업화 시기 공장에 들어가는 일은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동일방직과 같은 공장의 취직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들은 그토록 동일방직 여성노동자가 되고 싶어 했을까? 다락방과 달리 여러 조건들이 나았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8시간 일하고 9천 원 받았을 정도로 당시에는 고임금이었으며 기숙사, 목욕탕 등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사람잡는 기계들, 섬유업종
여성노동자들의 출근은 아침 6시, 2시 퇴근, 2시에서 10시, 다시 10시에서 다음날 아침 6시에 퇴근하는 이른바 ‘3교대 작업’이 1주일을 간격으로 교대로 이루어졌다. 섬유업체의 공정을 동일방직 추송례의 수기를 통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자. 동일방직의 공정은 방적과와 직포과로 분류되었는데, 방적과에서는 한겨울에도 25~26도를 오르내리는 고열 속에서 솜뭉치가 실로 만들어졌다. 게다가 눈에도 보이지 않는 솜먼지들이 눈, 코, 입에 달라붙어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반면 직포과는 방적과를 거쳐 만들어진 실을 천으로 만들어 내는 공정으로, 사람이 견딜 수 있는 적당한 온도가 유지되어서 다소 나은 편이었다. 반면 직포과는 끊임없이 작동하는 직기 수천 대의 굉음으로 인해 고무마개로 귀를 막아도 귀가 찢어질 지경이었다. 숙련공이 되면 보통 40~50대 정도의 기계를 보게 되는데, 24시간 돌아가는 기계를 쉴새없이 보다 보면 화장실 갈 시간조차 없었다. 또한 고온의 작업장은 여성들의 신체에 극심한 변화 - 안질과 고온다습으로 인한 피부병 - 를 가져왔다.


도급제와 공임제
가발을 생산하는 YH무역과 스웨터를 생산하는 삼원섬유의 경우 거의 모든 작업은 ‘도급제’로 이루어졌는데, 도급제는 작업 물품에 단가가 매겨지고, 일정한 노동시간 동안 개인의 작업성과에 의해 보상이 이루어지는 체계로, 노동자들의 초과 노동을 유도하고 경쟁을 조장함으로써 본질적으로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한 임금 체계였다.


실을 구해다가 편직기에서 옷을 짠 다음 제품 검사를 거쳐 불량이 발생하면 그 자리에서 처리하고, 가공부에서 불량을 제외하고 마무리를 하게 된다. 문제는 이런 불량품이 발생하면 개수 임금제로 짜여진 사실상 도급제에서 불량품의 수만큼 임금이 줄어든다는 사실에 있었다. 공임은 매당 얼마라고 정해져 있어서 "여름 티를 하나 짜는 데 뭐 백 원이다. 그 백 원을 공임이라고 그래"라는 식으로 정해져 있었다. 다른 수당은 일체 정해져 있지 않았고 회사가 일방적으로 공임 단가를 정했다. 이처럼 사실상의 도급제, 개수 임금에 의한 작업과정은 노동자들의 작업강도를 높이고, 엄청난 심리적 부담을 주었으며 일상적으로 공임 분쟁을 발생시켰다.


미숙련공의 생활 : 요꼬쟁이 모가지는 아흔아홉 개
* 요꼬는 니트를 지칭하는 일본어로, 봉제공정의 높은 노동강도를 노동자들이 한탄하여 스스로를 요꼬쟁이라고 부름

미숙련공하면 생각나는 것이 바로 ‘시다’이다. 한국에서 시다와 양성공 등으로 불렸던 미숙련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무시와 차별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이런 차별의 정당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 ‘숙련 담론’이었다. 대부분 여성노동자들은 미숙련 노동자로 취급되었다. 이것은 이들의 숙련도와 무관했는데, 숙련담론은 이들을 작업장 내부에서 ‘낮은 지위’로 고정시키기 위해 고용주 그리고 남성노동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간 여성노동자에 관한 연구는 한국 노동계급 내부의 숙련과 미숙련은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고 언급되어 왔다. 하지만 이는 당시 숙련을 둘러싼 공장 담론에 대한 철저하지 못한 인식 때문에 나타난 해석이었다. 미숙련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차별과 위계질서의 형성은 ‘숙련’에 대한 특정한 담론이 작동한 결과였다. 남성 노동자나 재단사 등의 숙련과 여성노동자의 숙련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지식체계는 작업장 위계질서 속에서 작동했던 것이었다. 이러한 여성노동에 대한 지배적 담론은 여공이 하는 작업은 ‘하찮은 단순 노동’이라는 여성노동에 대한 성별분업이란 가치가 개입되어 있었다. 이 점에서 산업화 시기 남성과 여성노동자의 숙련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는 해석은 여공의 숙련에 대한 특정한 담론을 은폐하는 효과를 낳는다.



여공들은 ‘투사’였나? - 민주노조 신화 ‘뒤집어 보기’


청계피복노조, 지식인의 정치적 실험장
1970년 11월 전태일의 분신 이후 청계피복 노동조합은 ‘민주노조의 상징’이 되었다. 청계피복노조 10년의 역사는 조합원들의 분신, 9?9 투쟁과 같은 빌딩에서의 투신, 자살기도, 단식투쟁, 연좌농성과 이에 따른 체포와 기소, 구속 등의 연속이었다. 이렇듯 1970년대 청계피복노조의 활동은 저임금과 다락방으로 상징되는 조건에서 강제된 전투적 투쟁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청계피복노조의 전투적 투쟁을 둘러싼 구체적인 배경과 맥락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왜 청계피복노조는 다른 노조와 대비되는 전투적인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했을까?


나는 이 점에서 학생 출신 활동가들이 생산한 담론 및 이것이 청계피복노조에 미친 영향이 다른 사업장과 청계피복노조를 구분 짓는 숨겨진 ‘익명적 지식’이 아닌가 생각한다. 1970년대 전반에 걸쳐 학생운동이 노동운동과 ‘조직적 연계’를 가진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대부분 성명서 및 연대 선언 등이 일반적인 형태였다. 그러나 청계피복노조는 다소 양상이 달랐다. 이동이 잦은 사업장의 성격은 안정적인 멤버십을 기반으로 한 조직 활동보다는 공권력의 탄압에 즉각적으로 대응, 시위, 농성 등 전투적 투쟁을 벌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재야 및 외부인사와 교류가 상대적으로 많았던 것도 다른 노조와는 활동 방식과 투쟁방식을 달리 취하게 만든 배경이었다. 그리고 다른 민주노조들은 가급적이면 법적 테두리 안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전개하고 문제가 사회화되는 경우 단위 노조는 사측과 공권력에 의해 직접적인 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청계피복노조의 경우 단위사업장 노사문제가 사회화되는 것이 오히려 일상적이었다.


청계피복노조는 1970년대 내내 전투적 투쟁을 전개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러한 해석은 민주화 담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실제로 청계피복노조의 조직력은 매우 취약했고, ‘파업 자체도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기도 했다. 이는 한편으로 청계피복노조가 조합원들의 조직적인 힘만으로 노동조합이 결성된 것이 아니라 전태일의 분신 항거가 커다란 사회 문제가 되어 사회 여론의 힘에 의해 결성된 측면이 강했던 조직적 한계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청계피복노조의 조직력은 외부에 과장되어 잘못 알려진 측면이 컸다.


YH 노조와 신민당사 농성 : 민주노조의 ‘학습효과’
YH 노조의 신민당사 농성 투쟁은 1979년 유신 말기 밑으로부터 일어난 대표적인 여성노동자 투쟁으로 기록되어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YH무역은 가발산업을 통해 급속히 성장했다. 그러나 특혜 수출 및 외화 도피 등으로 기업 부실이 심화되어 폐업과 인원 감축을 반복하다가 결국 1979년 3월 30일에 폐업조치를 취했다. 회사는 1977년경부터 부분적으로 라인을 정리하면서 본 공장을 정리하려고 시도했다. 폐업은 이미 조합원들에게 예견된 ‘오랜 싸움’의 마지막 국면이었다. 노조 간부들은 폐업을 맞으면서 이것이 마지막 싸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으며, 사측에 의해 폐업이 예고되었을 때 고용주가 YH무역을 더 이상 운영하지 않겠다는 것을 내심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쟁점이 된 것은 노조의 대응이었다. 청계피복과 동일방직의 노조는 투쟁의 외부화 및 사회화 전략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YH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YH 노조는 동일방직의 노조의 사례에서 지나친 노동문제의 외부화는 노조운동의 자율성과 현장 중심성을 상실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당시 YH 지도부는 외부 지원은 이를 통해 더 크고 장기적인 성과를 획득할 수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외부 지원으로 인해 더 큰 탄압을 받아 조합원들을 분열시키는 계기가 되거나 사측에 의해 조합간부들이 도시산업선교회의 지시대로 노동조합을 운영한다는 선전의 빌미를 제공받는다면 거꾸로 노조의 조직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상당히 우려했을 것이다. 이는 신민당 농성 이전 노조의 자구활동 및 내부 논의에서 확인할 수 있다.


YH 노조의 회사정상화투쟁은 대단히 중요한 투쟁이며 이 투쟁을 통해 민주노조운동을 살려나가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 조합원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과제를 어떠한 방법으로 실천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 차이가 있었다. 당시 현장 분위기는 회사정상화 자체에 비관적이었다. 그간 사측의 태도나 노동청의 잇따른 말 바꾸기 등으로 미루어 볼 때 YH라는 이름으로 회사가 정상화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또 다른 대안으로 제기된, 다른 노조에 들어가서 민주노조를 확산시키자는 계획은 다수 상집간부 및 조합원의 생각과 일치되지 않았다. 아마도 이런 사실들을 근거로 남성 노동사가들은 1970년대 여성 민주노조운동의 조합주의적 성격을 비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문맥은 그렇게 독해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 여성노동자들에게 취직과 이직 그리고 노조 참여에 이르는 과정은 가족이라는 사회관계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선택 과정이었다. 단지 여성노동자들이 재취업 내지 다시 노동운동에 복무할 의지를 지니지 못했다고 이를 ‘여공의 한계’ 내지 1970년대 여성 노조운동을 ‘조합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YH의 신민당사 농성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인천도시산업선교회와 연결된 동일방직과 비교하면 YH 지도부 그리고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절반의 성공’이었다. 당시 유신에 대한 가장 대중적인 정치적 반대세력이자 농성이 최고의 힘을 얻을 수 있었던 신민당을 점거한 것은 YH 회사 정상화 문제를 ‘사회화’, 아니 ‘정치화’시켰다. 유신붕괴 직전 YH 여성노동자들이 겪었던 폐업과 잇달은 민주노조의 무력화 그리고 외부세력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공격이라는 조건은 YH 여성노동자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힘에 의한 투쟁을 강제했다. 취약한 고용주 대신 정부와 공권력과의 전면적 대립을 반복했던 청계피복노조, 도시산업선교회의 전면적 개입 과정에서 무력화되었던 동일방직 노조의 교훈은 YH 여성노동자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만 현장 중심의 노조가 유지될 수 있다는 사유방식을 강화시켰다.


‘민주 대 어용’이란 신화
노동사가들은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을 전투적인 투사 혹은 민주노조운동의 영웅으로 기술해 왔다.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상당수 해석들이 공유하는 것은 여공과 그들의 운동이 지닌 내부의 ‘복잡성’을 민주 대 어용이라는 이분법적인 틀로 환원시킨다는 점이다. 상당수 연구들은 1970년대 민주노조를 주도했던 여성노동자들이 가장 큰 문제로 느낀 것을 노동조합의 ‘어용성’ - 대표적인 것이 도시산업선교회와 어용노조였던 한국노총 간의 ‘균열’ - 이라고 지적하면서 1970년대 노조에서 남성중심주의를 중심 문제로 다루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고 논한다. 하지만 바꿔 생각해보면 중심 균열은 ‘어용 대 민주’로 단순화되었고 기타 균열 - 남성노동자와의 문제, 교회 및 지식인과 노동조합 간의 관계 등 - 은 주변화된 서술로 밀려났다. 동시에 민주노조의 주체인 여성노동자들을 중성적?남성적 전사?투사의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동시에 민주노조운동 일반은 무모순적인 것으로 신화화되었다.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여공은 부차적인 주제 혹은 보조적인 역할로 제한되었고 노조라는 공적 활동과는 거리가 먼 대상으로 담론화되었다. 여성노동자들이 노동자로서 권리의식을 획득하더라도 이것은 여성으로서 경험에 입각한 것이라기보다 보편적인 노동자의 그것, 즉 중성적인 ‘투사’라는 담론을 통해 해석되었다. 남성성이 강조되는 노동계급과 노동운동의 지배적인 이미지는 폭력이 수반되는 전투성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미화했으며, 이는 노동계급의 이상적 남성성이 육체적인 힘의 과시와 가정 내부 가부장성의 강화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믿음과 관련이 깊다. 이처럼 1970년대 노동운동을 둘러싼 지배적 담론은 이상적인 남성의 이미지를 재현함으로써 노동자들의 투쟁적 정체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자연스럽게 ‘계급의식’은 육체적 저항의 강도로 환치된다.



공순이, 타락했냐? -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시선


여대생 되기
민주노조 활동가(혹은 지식인들이 채록한)의 기록들에는 여성노동자들이 자신이 노동자임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여성노동자들이 스스로를 ‘노동자’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 사이에는 노동자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작업장과 일상에서 ‘훼손당한 여성다움’을 맹렬하게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여성노동자들에게는 천하고 막 되먹고, 노는 애들 혹은 품행이 방정하지 못하고, 남자관계가 문란한 무식한 것들이라는 ‘꼬리표’가 늘상 붙어 있었다. 모멸감과 공순이라는 자기 비하에 대한 여성노동자들의 담론은 공순이처럼 보이는 ‘외양’을 거두어들이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한 가지 방식이 여대생인 것처럼 차리고 다니는 것이었다. 또한 여성노동자들은 화장, 고가의 할부 옷 구입 등 중산층의 라이프스타일을 모방하기도 했다. 결국 균등하지 않았지만 여성 사업장 여성노동자들이 매우 빠른 속도로 자신이 ‘노동자’임을 자각했다는 민주노조운동의 지배적인 해석 - 저항적 정체성으로 여성노동자를 서술하는 해석 - 은 여성노동자를 내부의 차이를 무효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여성노동자들의 권리의식 성장에도 불구하고 신분상승 의식이나 사무직이나 화이트컬러 직종에 대한 선망이 쉽게 사라지지 않은 이유, 다시 말해 자신이 ‘노동자’임을 부정하고자 했던 이유는 산업역군으로서 자긍심마저 압도한 ‘파괴된 여성성’에 대한 공포를 그녀들이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자신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화이트컬러 남성과 결혼을 목적으로 여성노동자들은 결혼시장에서 자신의 가치를 한 단계 높이기 위해 공장과 공장 외부를 격리시켰다. 다시 말해서 여성노동자들은 공장에서 하는 노동에 대해서는 무성적인 의미를 부여했지만 대중매체에서 재현되는 여성성을 더욱 열광적으로 모방하며 훼손당한 여성성을 복원시켜 나가고자 했다. 분명 여성노동자의 정체성 형성에서 ‘저항적인 측면’이 존재했다. 하지만 저항적 정체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여성노동자들이 지닌 일상적 욕망이란 지점을 ‘부차적인 현상’으로 간주해왔다. 이것 역시 산업화 시기 노동사 서술에서 감추어진 측면임이 틀림없다.


국가의 여공담론 : ‘윤리와 과학이 조화되는 가정’
산업화 시기 과도한 인구팽창은 위로부터 권위적 방식을 통해 통제되었다. 동시에 인구 억제를 통해 빈곤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단순 논리에서 한 걸음 나아가 경제 발전의 최대 자원이 인력이기 때문에 보다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인구 관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한마디로 ‘인력개발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정책 아래에서 여공에 대한 담론도 변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부녀행정이 계몽과 통제 그리고 보호라는 흐름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초창기부터 부녀 행정은 어머니로서 여성의 자질 향상, 가정생활의 합리화 등 가족 내 여성에 대한 지도, 계몽 그리고 공창제 폐지와 미혼모 방지 운동 등 가족 밖으로 탈락된 여성에 대한 통제 및 보호라는 두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전통가족에서 농사일과 가사 일을 동시에 떠맡으면서 생산의 일선에 서 있었던 여성들은 이제 가족생활 속에 영양, 청결, 보건 등의 근대적 가치를 도입하고 자녀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바람직한 어머니상’으로 다시 발명되어야 했다. 이는 경제개발과 건전한 노동력의 안정적인 재생산을 위해 가족의 전반적인 재편성을 의미했고, 그 안에는 근대적 가치를 상징하는 과학과 성별 분업에 기반한 모성을 강조하는 윤리가 결핍되어 있었다.


여공과 가족 그리고 결혼
그렇다면 결혼과 가족에 대한 여성노동자들의 담론은 어떠했을까? 중산층 여성들의 ‘낭만적 로맨스’와 달리 여성노동자들에게 있어서 결혼은 자신들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사회적 사건이었다. 특히 한국에서 결혼은 산업화 시기에도 여전히 두 가족 사이의 ‘거래’라는 성격이 강했다. 또한 결혼은 개인으로서 여성노동자의 선택이라기보다 가족과 연루된 기대심리의 반영이었다. 자신보다 좀 더 나은 직장에 다니는 남성과 결혼해서 공장에 나오지 않는 것도 커다란 욕망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여성노동자들은 결혼 후 첫아이를 낳은 뒤 재취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남편이 재단사일 경우 6~7만 원 정도의 수입으로는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고 아이들의 수도 적지 않아 더욱 그러했다.


여공들의 사랑, 동거 문화와 이성애
모든 여성을 ‘현모양처’로 상정했던 산업화 시기 지배적 담론 아래에서 결혼이 전제되지 않은 이성애는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가족과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했던 여성노동자들의 자유분방한 이성애는 침묵되어야 할 것, 다시 말하면 지배적 담론에 의해 감춰져야 하는 ‘익명적 지식’이었다. 또한 공단지대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동거 문화’는 노동자들의 이성애가 사회적 통념을 뛰어넘는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드러내 준다. 노동자들의 동거는 생계비 절약을 위한 생계형 동거였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 큰 부담 없이 받아들여졌으며, 대부분 동거를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난하고 혼기가 찬 여성노동자들에게 동거는 하나의 선택이었으며, 이는 동거가 결혼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처럼 여성노동자들의 이성애 경험은 유교적 순결 이데올로기, 중산층 로맨스 문화를 전복할 해방적 잠재력을 지녔을지 모르나 그것이 언어화되지 못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무의식적인 잠재력’으로 존재했을 뿐 의식화된 실체로서 모습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미래의 모성’과 여공의 욕망
산업화 시기 한국 여성노동자들은 국가의 생산성 향상을 위해 동원되어야 했던 산업 전사였을 뿐만 아니라 건강한 신체를 지녀야 하는 ‘미래의 모성’이라는 담론을 통해 규율화되었다. 이는 여성노동자의 신체나 성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박탈하려는 것이었으며, 작업장 내부와 외부에서 ‘여성다움’ 혹은 ‘여성성’에 대한 고착된 지식체계를 여성노동자의 신체에 각인시키는 것이었다. 이처럼 여공에 대한 부정적 사유체계가 형성되고 준비된 모성으로 그들을 상상했던 것은 산업화 과정에서 작동한 지식체계의 효과였다. 여성노동자들은 기초적인 학교교육만을 받을 수 있었고 공장 내 부수적으로 행해지는 교육 과정에서도 산업화가 요구했던 기술적 합리성으로부터 배제되었다. 그 대신 고용주와 가족에 대한 복종 그리고 건전한 모성을 위한 금기와 관련된 지식체계들이 강조되었다. 이 점에서 여성노동자의 신분 상승에 대한 기대와 욕구는 단지 낮은 의식의 반영이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 이들이 체계적으로 배제된 결과였다.



남진, 나훈아에 열광했던 여성노동자들 - 여공의 문화


여공들이 읽었던 책들, 여공의 ‘지성사’
당시 유신 체제에서의 일상적인 감시와 구속 그리고 가택 수색 때문에 여성노동자들은 자취방, 기숙사 등에서 자유롭게 책을 읽기 어려웠을 것이다. 노조나 여성노동자들 자신의 독서 목록이나 사내 도서관 도서 목록 같은 것을 발견하기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여성노동자들이 소모임 등에서 교육받을 때 읽던 책들을 부분적이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에 기록된 도서 및 교육 자료가 그것이다. 도서 목록을 보면 ‘기본도서 12권’이란 이름으로 적혀 있는데 목록은 아래와 같다.


『에세이 예수의 죽음』(종로서적), 『현실에 도전하는 성서』(분도), 『철학 에세이』(동녘), 『서울로 가는 길』(형성사),『근로자의 벗』(일월서각),『마더 존스』(평민사), 『서울로 간 허수아비』(산하),『세계사 편력』(석탑),『뜻으로 본 한국사』(한길사),『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동서문화사) 『일꾼의 성서』(감리교 본부 선교국), 『미혼의 당신에게』(백산서당)


아마 소모임 등에서 의식화 교육을 위해 사용했던 목록으로 추측되는데, 주로 성서 관련 분야, 노동자의 생활을 다룬 수기와 소설 그리고 역사, 여성에 관한 사회과학 입문서들이다. 당시 여성노동자들은 독서할 시간 여유는 많지 않았을 것이며, 체계적인 지식을 제공해 줄 장소는 크리스챤 아카데미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실무자들의 경우 대부분 투쟁의 조직화, 노조 소모임 등으로도 시간이 모자라는 형편이라서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하지는 못했다. 독서 목록을 통해 본 여공의 문화는 다소 제한적이다. 이는 노조 간부들이나 소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여성노동자들의 ‘문화적 양식’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다음으로 여성노동자들이 일상적으로 즐겨 부르던 노래를 살펴보기로 하자.


‘트로트’와 여공의 세계
산업화 시기 한국 노동자들이 불렀던 노동가요는 크게 두 가지 종류로 구분될 수 있다. 한 가지는 이른바 노동가, 1980년대 들어서는 민중가요라고 불렸던 노래들이다. 또 다른 하나는 노동자들이 일상적으로 즐겨 부르던 노래인 가요였다. 노동가는 노조의 결성과 투쟁을 위해 ‘목적의식적’으로 만들어졌으며, 노동자들이 즐겨 불렀던 가요들은 당대 노동자들의 경험과 정서를 보여준다.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던 대표적인 가수는 남진과 나훈아였다. 열아홉에서 이십대 초반이던 여성노동자들에게 남진과 나훈아는 문화적 상징이었으며, 이는 1990년대 이후 팬클럽에 못지않았다. 내가 남진과 나훈아로 대표되던 트로트에게 주목하는 이유는 이들의 노래가 여공, 식모 등 하층계급 여성들에게 호소력이 있고 인기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트로트라는 장르가 산업화에 따라 고향을 떠나와서 도시의 화려함의 선두에 서서 살지 못하는 소외당한 사람들의 고달픔을 다루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노동자의 욕망과 정서를 대변했던 트로트에 비해 노동가는 어떠했을까?


노동가와 노동조합
대부분 노동가는 의식화를 위한 내용을 함축했고 국내?외 곡을 개사, 번안해서 부르기도 했으며 필요에 따라 창작곡의 형태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노래를 통한 교육은 여성노동자들의 정서에 직접적으로 호소함으로써 노동자들 사이의 일체감 형성이란 면에서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이 시기에는 독자적인 창작 노동가보다는 개사, 번안 그리고 특히 ‘노래가사 바꿔 부르기’(이하 노가바)가 유행했다. 흥미로운 점은 노가바는 군가나 정부에서 만든, 예를 들어 ‘조국 찬가’의 노랫말에 가사를 바꾼 경우가 많았다. 청계피복노조의 투쟁가도 ‘전우여 잘자라’라는 대중가요를 개사한 것이었다. “전태일 동지의 죽음을 헛되지 하지 말자/노동자와 학생은 다 같이 투쟁한다/피에 맺힌 복지사회 언제나 오려나/강철같이 단결하여 끝까지 투쟁한다.” 당시 불리던 노래들을 가사의 주제별로는 노동조건에 대한 폭로와 선동, 고용주에 대한 비난, 단결 촉구, 공권력에 대한 증오 등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여공의 문화는 여성노동자들이 작업장, 주거, 가족, 노조, 그리고 기타 사회적 관계들을 자신들의 경험, 가치 등을 통해 표현한 산물이었다. 하지만 여공문화가 지속적으로 ‘저항적’이었다는 이해는 여공 문화 내부의 균열과 모순 그리고 지배적 담론과 타협하는 과정을 포착하지 못할 수 있다. 한편으로 여성노동자들이 읽던 책들은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강화시켜 주었지만 여공에 대한 지배적인 담론, 즉 낮은 지위, 여공이란 정체성에 대한 부정 등이 각인되어 있었다. 또한 여성노동자들이 즐겨 부르던 가요에 잠재된 욕망이었던 이직?결혼을 통한 신분 상승, 대학 입학, 소시민성, 가족에의 집착, 여성노동자 간 경쟁 등은 여공문화 안에 자리 잡았던 내부적 균열이었다. 이 점에서 여공의 문화에는 지배적인 담론(가족적 가치, 농촌에 대한 향수, 유사가족적인 가치 등)과 여성이자 노동계급으로서 지향할 이상적 가치가 중첩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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