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탁상 위의 전략은 믿지 않는다

저   자
크리스터 요르젠센(역자: 오태경, 감수: 한국국방안보포럼)
출판사
플래닛미디어
가   격
25000
출판일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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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정보


■ 책 소개
독일의 유명한 장군이었던 에르빈 롬멜에대한 기록을 전하는 책.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으로 불린 롬멜은 2차대전 중 아프리카군단의 사령관으로 기갑사단을 지휘하여 극적인 승리를이끌어내면서 그 공로로 최연소 육군원수에 임명된 장군이다. 전차전의 귀재였던 그는 기발하고 탁월한 전략과 전술, 공격적이고 지칠 줄 모르는용맹, 정치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군인정신 등으로 아군과 적군 모두에게 존경받았던 패전국의 빛나는 사령관이었다.

 


책은 총8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으며, 탄생부터 히틀러에게 죽임을 당하기까지의 이야기를다루었으며, 에르빈 롬멜의 무엇이 그를 특별하게 만들었는지 밝히고자 했다. 또한 롬멜의 전차군단, 두 번의 세계대전과 그의 지휘 아래 싸웠던사람들, 그리고 신화가 된 총사령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지휘자로서의 능력만큼 인간적인 약점도 많았던 롬멜, 아군과 적군 모두의 존경을 받았지만양쪽의 공격도 받아야 했던 롬멜, 오랜 시간 히틀러와 함께였지만 그를 제거하려는 사람들과도 함께였던 롬멜, 유대인 학살을 일삼는 나치돌격대를비겁한 군인이라 했던 롬멜 등 그의 사령관으로서의 모습과 인간적인 면모를 두루 살펴본다. & 


■ 저자 크리스터 요르젠센 ChristerJorgensen
나폴레옹전쟁 당시인 1805~09년 영국과 스웨덴 사이에 체결된 동맹에 관한 연구로 런던대학교에서박사학위를 받았다. 영국 피츠로이 디어번 출판사에서 펴낸 군사 백과사전의 무기 및 군사 관련 항목을 집필하였으며, 같은 출판사의 낭만주의시대에관한 백과사전 편찬에도 참여했다. 저서로 『20세기의 전차들Tanks in the Twentieth Century』과 크리스 만과 공동으로집필한 『히틀러의 북구전쟁Hitler"s Arctic War』이 있다. 『히틀러의 북구전쟁』은 1940~45년 사이 노르웨이와 핀란드, 구소련등 북유럽 지역에서 진행된 독일군의 전역에 관한 내용이다. 현재 스웨덴에 살고 있다.


■ 역자 오태경
1978년생. 서울대학교 법과대학법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미래에셋증권 선임컨설턴트로 근무중이다. 공군 복무시절 처음으로 군사서적 번역작업을 시작하여 『방공전사』 등 다수의공군관련 편역서 발간에 참여했다. 또한 일러스트레이션에도 관심이 많아, (주)군사정보에서 출판한 『네이비씰(양욱 지음)』의 삽화를 시작으로중앙일보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 풋볼위클리, 랜덤하우스중앙 등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했다.


■ 차례
책머리에 | 신화가 되어버린 전사
프롤로그 | 적들마저 경의를 표했던 천재 지휘관 


chapter 1. 훌륭한 군인 
루마니아 전선에서전쟁을 배우다 
목표달성을 방해하는 명령은 기꺼이 무시하라 
빛나는 패전국 장교 


chapter 2. 정치군인 히틀러의 등장 
장비도넘쳐나고 덜떨어진 개념도 넘쳐나는 시대 
히틀러, 전차사단 막강 후견인 
가장 매력적인 조합 전차와 슈투카 
전차의 미래를읽어내다 


chapter 3. 유령사단 
황색작전과 낫질작전
뫼즈의 전투 
마지노선을 뚫다 
프랑스를 가르며 바다로 진격하다 
연합군 정예사단을 가두다 
또 하나의 훈장을 달고북부 전역을 종결짓다 
프랑스에 마지막 일격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를 점령하다 


chapter 4. 북아프리카의 회오리바람 속으로
영국의 식민지를 탐하다 
탄두는 마틸다의 장갑판 위로 튕겨나고 
여우가 사막에 도착하다 
사막, 가장부적합한 전쟁터 
전술의 천국 보급의 지옥 
막강 요새도시 토브룩 
처음 경험하는 심각한 좌절 


chapter 5. 공격 아니면 맹공격 
제1차헬파이어 전투 
제2차 헬파이어 전투 
사막의 여왕 마틸다를 관통하다 
‘끈질긴 친구들’의 통신을 낚아채다 
압승
대공포를 대전차용으로 활용하다 
병사는 배가 불러야 진군한다 
영국, 북아프리카로 힘을 모으다 
새로운 사령관과 새로운병기들 
모방이라는 무섭고도 단순한 작전 
11월 23일 죽음의 일요일 
전차 30 대 200, 국경을 버리고 퇴각하다
값비싼 탈출 

chapter 6. 절정의 롬멜
 
급소를 찌르다 
공격은 쭉쭉뻗어가는 번개와도 같아 
또 하나의 기발한 전술 ‘가마솥’ 
여우를 감동시킨 자유프랑스의 자존심 
비르 하케임보다 힘든 전투는없었다 
다시 토브룩으로 
최연소 육군 원수 
문제는 속도다 
열정과 추진력 그리고 무한한 낙관주의 


chapter 7. 위대한 영웅의 황혼 
롬멜의 전술로롬멜을 치다 
재난에 가까운 오판 
무솔리니를 병들게 하다 
멍청한 사령부와 삐딱한 동맹군 
1류전략 3류지휘 
수지안 맞는 임무 
제공권을 잃고 주도권을 빼앗기다 
황금기는 저물고 
특수부대들의 합동공격을 격퇴하다 
괴터대머룽, 위대한신의 황혼 
이탈리아 장교는 쓸모없고 이탈리아 정부는 더 쓸모없다 
사막의 결정전이 막을 올리다 
사막으로 돌아와 지휘권을회복하다 
너무 늦어버린 지원 
불복종은 해임 복종은 괴멸 
히틀러를 거역하다 


chapter 8. 몰락 
위대한 퇴각 
새롭고위험한 적 
튀니지, 교두보 또는 함정 
트리폴리가 함락되다 
사막의 마지노선 마레트 
로마의 지원을 받다 
또하나의 스탈린그라드 
친구라는 가식을 내려놓다 
노르망디에서 마지막 저항을 준비하다 
잔인한 생일선물 
히틀러의 제거를논의하다 
운이 다한 영웅의 마지막 승리 
친애하는 총통의 마지막 명령 


연보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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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요약

나는 탁상 위의 전략은 믿지 않는다


훌륭한 군인
에르빈 롬멜은 1891년 독일 남부의 슈바비아(Swabia) 지역 작은 도시 하이덴하임(Heidenheim)에서 태어났다. 그 지역 사람들은 부지런하지만 무뚝뚝하고 완고한 성격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생토록 고향에 대한 강한 애착을 지니고 있었던 롬멜은, 군인으로 살아가는 동안 내내 그곳 출신 특유의 인내심과 강인함 그리고 영특함을 보여주었다. 롬멜은 특유의 슈바비아 억양을 일생동안 유지하고 있었다.

1910년 7월 뷔르템베르크(Wurttemberg) 제124보병연대(슈바비아는 당시 뷔르템베르크 왕국에 속해 있었다)에 입대한 롬멜은 1년 후 단치히(Danzig) 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사령관은 사관생도 롬멜에 대해 ‘훌륭한 군인으로 무한한 의지력을 가졌다. 또한 총명하고 열성적이며 임무에 대한 면밀한 감각과 함께 훌륭한 전우애를 갖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쯤 일생의 연인인 루시에 몰린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 롬멜은 1916년에 그녀와 결혼했다.


롬멜의 연대는 슈투트가르트(Stuttgart) 인근에 주둔했고, 그는 1914년 3월 제49야전포병연대에 배속될 때까지 그곳에서 신참으로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그해 8월에 1차대전이 발발하자 롬멜의 독일 제5군 소속 연대는 아르덴(Ardennes) 남쪽에 접한 프랑스 동부지역을 침공했다. 그곳은 이후 2차대전 동안 프랑스 전선의 롬멜에게 매우 친숙한 곳이 될 지역이었다. 전쟁의 유동적인 상황에 흥미를 느낀 롬멜은, 마치 자신이 보병이 아니라 기병이며 사령관인 것처럼 작전을 지휘했다. 8월 22일, 그는 소수 분견대를 이끌고 블레(Blied)의 작은 마을을 점령해서 30명을 사살하고 12명의 프랑스 포로를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 개인의 지략과 부대의 용맹으로 롬멜은 2급 철십자 훈장을 받게 되었다. 롬멜에게는 마치 블러드 하운드처럼 적의 약점을 알아채는 감각이 있었다. 그는 늘 공격하길 원했으며, 언제나 자신이 작전을 담당하려 했다. 이는 종종 상급자들의 분노를 샀다. 그러나 롬멜은 솔선과 독립성의 가치를 믿었고, 그것은 엄격한 계급 조직의 규율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15년 9월, 롬멜은 뷔르템베르크 산악대대에 합류하게 되는데, 이곳에서의 복무를 통해 가장 험한 환경에서 부대를 이끄는 독자적이고 대담한 지휘관으로 거듭나게 된다. 롬멜의 대대는 1916년 10월에 루마니아 전선에 배치되어 부쿠레슈티로 향하는 팔켄하인 진영에 가담했다. 그러나 텐트 등 장비의 부족으로 그의 대대원들은 동상과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롬멜은 여기서 부대의 운용에 대한 가치 있는 교훈을 얻었다. 최고 수준의 전투력을 얻기 위해서는 지휘관이 직접 그 부대를 돌보아야 하며, 또한 지휘관은 부대원의 고통과 문제를 함께 나누어야만 그들로부터 존경과 충성심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너 자신이 하고 싶지 않거나 할 수 없는 일을 남에게 부탁하지 마라.’ 이때부터 이 말은 롬멜의 좌우명이 되었다.


롬멜은 1917년 후반까지 이탈리아 전선에 남았다가 이듬해에는 서부전선(Western Front)에서 복무했다. 이 서부전선에서 롬멜은 사람을 소심하고 굼뜨게 만드는 참호전을 가장 혹독하게 경험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 없는 전방에서 보내며 기동전으로 큰 효과를 거두었던 장수였다. 프랑스군이나 영국군과는 달리 롬멜은 큰 전쟁에서의 기동전의 잠재력과 타당성을 믿었다. 2차대전에서 중요한 동맹이 될 이탈리아 및 루마니아와 싸우면서 롬멜이 담력과 기지로 명성을 얻었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에 관한 이런 사실은 롬멜에게 상당히 유익한 경험이 되었다. 알프스 전투에서 보여준 이탈리아군의 부진은, 이후 동맹이 되고 난 후 롬멜이 이탈리아군을 신뢰하는 데 신중을 기하게 만들었다. 롬멜이 이탈리아인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사막전 동안 이탈리아인들이 보여준 금욕주의에 찬사를 보냈으며, 그의 딸 게르트루트가 이탈리아인과 결혼하는 것도 반대하지 않았다.


1918년에 전쟁이 끝났지만 그의 빛나는 승리들 때문에 롬멜은 패전국 장교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훌륭하게’ 전쟁을 수행해낸 롬멜은 히틀러(Adolf Hitler)와 달리 개인적인 수치심과 모욕감에 시달리지 않았다. 그는 이미 다음 라운드를 위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정치군인 히틀러의 등장
1918년 롬멜은 겨우 스물일곱 살이었으나, 이미 전후의 독일군인 ‘바이마르 국방군(Reichswehr)’에서 고급훈장을 받은 장교였다. 오직 아내와 일에만 헌신했던 애국심 투철한 이 젊은 장교는 운좋게도 군에 남아 중용되었다. 1919년 3월에 롬멜은 불만 가득했던 좌익 해군 분견대에 배치되어 곧 충성심 강하고 호전적인 부대로 바꿔놓았다. 1920년 봄, 롬멜은 베스트팔리아(Westphalia)의 공산주의 반군과 싸웠고, 1920~29년에는 슈투트가르트 라이플중대의 훈련 지휘관으로 복무했다. 1933~34년까지는 고슬라르(Goslar)에 주둔하는 경보병대대의 지휘관으로 복무했다. 그는 이때를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때라고 회고했다. 1934년 12월, 롬멜은 이른바 ‘롬멜 대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1928년의 히틀러는, 5년 전 뮌헨(Munich)에서 발생한 실패한 쿠데타 ‘비어홀 폭동’을 조직하고 이끌었던 것 외에는 내세울 게 없는 무명의 정치적 극단주의자였다. 그러나 1931년에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당(NSDAP, 즉 나치)은 독일의 최대 정당이 되어 있었다. 실업과 불안, 그리고 독일을 절망으로 몰고 갔던 전 세계적인 경제공황이 결합되어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당은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고, 1933년 1월 마침내 히틀러는 권력을 획득하여 독일의 수상이 되었다. 거만하고 이기적인 독일 상류층에 혐오를 느끼고 있던 롬멜도 히틀러를 대중의 지도자로 인정하고 나치의 급진주의에 호감을 가졌다. 그러나 롬멜은 나치의 반 유대주의를 불쾌하게 여겼으며, 1934년 6월에 일어난 ‘장검의 밤(Night of the Long Knives)같은 형태의 대규모 숙청은 완전히 무익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롬멜은 엘 알라메인(El Alamein) 전투까지만 해도 히틀러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나 그 이후로는 비판적이 되었다. 어쨌든 1934년 고슬라르에서 롬멜은 히틀러를 처음으로 만났으며, 그때부터 친 나치 장교이자 히틀러의 부하로 간주되었다.


1937년에 롬멜은 매력적이지만 거만한 발두르 폰 쉬라크(Baldur von Schirach)의 휘하에서 히틀러 유겐트(Hitler Jugend)와의 연락장교 임무를 부여받았다. 히틀러와의 관계가 우정보다 훨씬 더 돈독했던 롬멜은 곧 히틀러의 경호대장으로 승진했다. 1939년 3월의 보헤미아 점령기간 동안, 롬멜은 망설이던 히틀러를 설득하여 있을지도 모르는 암살기도를 정면으로 돌파하여 소규모의 경호대만 대동한 채 차편으로 프라하(Prague)를 방문하도록 했다. 체코의 수도에 히틀러가 입성한 것은 선전적인 일격이었다. 이 일로 히틀러는 롬멜에 대해 배짱과 ‘필요한 자질’을 지닌 장교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무솔리니의 장군들 중에서도 가장 공격적인 성향의 소유자였던 루돌포 그라치아니. 리비아 민족주의자들을 토벌하면서 명성을 쌓은 그는 1922-23년에 트리폴리타니아 내륙을 제압하고 쿠프라로 진군했다.


북아프리카의 회오리바람 속으로
1924년부터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였던 무솔리니는 그 자신과 국가를 위한 야심에 차 있었다. 그는 아프리카 땅에 있는 이탈리아의 영토를 이집트와 수단에 걸친 영국 점령지까지 확장시키고 싶었다. 무솔리니는 이집트에서 영국을 물리침으로써 자신의 동아프리카 제국을 완성하기를 진정으로 갈망했다. 광대한 영역을 방위하는 중동의 빈약한 영국군을 상대하는 것은 과도한 자신감에 차 있던 이탈리아에게는 무척이나 쉬워 보였다. 영국군은 단 3만 6000의 병력으로 이집트를 방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탈리아는 무솔리니가 가장 신뢰하는 맹장 루돌포 그라치아니(Rudolfo Graziani) 원수의 지휘 하에 리비아에 약 25~30만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라치아니의 명성은 우마르 알 무크타(Umar al Mukhtar)가 이끄는 리비아 민족주의자들을 토벌하면서 확립되었다. 그라치아니는 1922~23년에 걸쳐 트리폴리타니아(Tripolitania)의 내륙을 제압하고 쿠프라(Kufra)로 진군했다. 이런 대담한 전역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군은 1932년까지 무크타를 체포하여 제거하지 못했다. 무크타의 제거는 20년에 걸친 식민지 전쟁의 종식을 의미했다.


사막, 가장 부적합한 전쟁터
현대전을 수행하기에 불편하고 부적절한 환경이라는 점에서 북아프리카 사막과 비길 수 있는 곳은 아마 극지방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영국군은 프랑스령 북아프리카를 따라 뻗어 있는 나일(Nile) 강의 서쪽 사막지역을 ‘서부 사막’이라고 불렀다. 25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면적은 인도 대륙의 넓이와 맞먹었으며, 나일 강으로부터 튀니지까지 걸친 길이는 1930킬로미터에 이르렀고, 지중해에서 남쪽의 아프리카 사바나 사이의 거리는 1600킬로미터가 넘었다.


또 리비아 동부의 키레나이카로부터 나일 강 입구의 알렉산드리아까지 64킬로미터의 폭으로 해안을 따라 펼쳐진 좁고 긴 땅은 남쪽에 있는 사막보다 고도가 높았다. 석회암 모래로 이루어진 그 지역은 관목덤불에 야자나무도 있었고 작으나마 듬성듬성 경작지도 있었다. 키레나이카와 토브룩 인근으로는 무장한 차량이 이동할 수 있고 접근하기도 쉬운 사막이 넓게 펼쳐져 있었지만, 다른 곳은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3년간의 전쟁기간 동안 롬멜의 밀고 당기는 전투는 두 개의 중요한 병목지역 사이 공간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남쪽의 적 점령지역에 대해서는 보통의 광범위한 작전이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대사해(Great Sand Sea)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병목지역은 엘 아게일라(El Agheila)로, 지중해 해안에 거의 인접해 있었다. 또 남북으로 966킬로미터, 동서로는 241킬로미터에 달하는 대사해 때문에 이집트와 리비아의 경계는 지중해까지 단 322킬로미터의 거리만으로 줄여지게 되었다. 동쪽에 있는 또 다른 병목지역은 엘 알라메인(El Alamein)이었다. 바다와 카타라(Qattara) 저지(低地) 사이의 해안을 따라 형성된 좁고 긴 땅 엘 알라메인은 깔때기 모양으로 좁아지는 회랑지대였다.


카타라 저지는 질퍽하고 흐물흐물한 모래와 염분이 있는 습지로 악명 높은 곳으로, 자동차와 전차가 통행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자동차로 횡단하려던 사람들은 마치 라이스 푸딩 위에서 운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전투는 이 두 지역 엘 아게일라와 엘 알라메인을 우회하여 가운데 지점인 훌륭한 요새도시 토브룩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북아프리카에는 현대전의 수행에 필수적인 포장도로와 철로 등의 시설이 충분하지 않았다. 영국군은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철로를 부설했으나 철도는 리비아 국경에서 241킬로미터 떨어진 메르사 마트루까지만 연결되었다. 트리폴리에서 이집트 국경까지 연결된 리비아의 비아 발비아가 이탈리아 기술의 진수를 보여준 진정한 작품이었던 데 비해, 1차선인 해안도로는 너무 얇게 포장되어 많은 교통량을 지속적으로 견뎌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다른 경로는 가끔 있는 폭우에 진흙탕이 되어버리는 단순한 소로에 불과했다. 비는 와디(wadi)를 사나운 진흙탕 길로 바꾸어놓곤 했다. 더구나 사막의 모래는 흙가루와 같아서 조그만 움직임에도 흰 구름을 일으키기 때문에, 자욱한 먼지는 군대의 존재를 수마일 떨어진 곳에서도 알아챌 수 있게 했다.


처음 경험하는 심각한 좌절
롬멜은 4월 16~17일에 걸쳐 단독으로 두 번째 공격을 시도했으나 소득은 아무것도 없었다. 롬멜은 실패의 원인으로 이탈리아군의 빈약한 무장과 훈련을 지목하고 그들을 비난했다. 영국의 전차와 화포사격을 두려워하고 있는 이탈리아군인 그들의 투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신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탈리아군에 대해 롬멜은 ‘빨리 수건을 던진다’라고 1917년에 이미 비관적으로 적어놓은 바 있다.


롬멜의 이탈리아군에 대한 비판은 어떤 면에서는 불공평했다. 그의 즉흥적인 공세가 저지된 것은 오스트레일리아군이 예상보다 더 끈질기게 저항했기 때문이었다. 먼지와 열기, 그리고 사막이 주는 불편함에 자신들의 적보다 좀 더 익숙했던 오스트레일리아군은 야전에 강한 부대였지만 콘크리트와 철조망 뒤에서는 더욱 견고했다. 다른 군대와 달리 오스트레일리아군은 포격(砲擊)과 슈투카(Stuka, 급강하폭격기) 그리고 전차의 협공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능한 모든 무기로 반격을 가했다. 다른 독일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롬멜 역시 이 키 크고 구릿빛으로 그을린 거친 용사들에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가장 모진 포탄 세례 속에서도 냉철한 용기를 보여주었다. 포위 공격을 계속하고 있던 어느 날, 롬멜의 운전병 하인츠 슈미트는 참호에서 기어 나온 한 오스트레일리아군 병사가 난간에 걸터앉아 특유의 축 늘어진 모자를 독일군을 향해 명랑하게 흔드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오스트레일리아 병사 주위로 총탄이 성난 벌떼처럼 빗발치는 동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롬멜이 전장에서 처음으로 경험한 이 심각한 좌절은 독일 고위사령부 내의 비판자들에게 그의 위험한 아프리카 원정에 대해 수군거릴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고, 거침없던 경력에 큰 흠이 되었다. 가장 혹독한 비판을 가한 사람은 육군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Franz Halder) 장군이었다. 할더는 사실에 근거해서라기보다는, 롬멜이 히틀러의 보호와 지원을 받고 있으며 명문가 출신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할더는 이제 ‘완전히 미쳐버린 이 군인을 해고하기’를 원했다. 그는 신뢰할 만한 장교인 프리드리히 파울루스(Friedrich Paulus) 장군을 북아프리카에 보내서 상황을 체크하고 베를린에 보고하도록 할 작정이었다. 4월26일에 도착한 파울루스는 독일 아프리카군단 사령관으로부터 다소 냉랭한 영접을 받았다. 파울루스의 변명과 해명에도 불구하고 롬멜은 그의 방문을 최고사령부의 간섭이며 언제 있을지 모를 해임의 전조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파울루스는 토브룩 공격에 비판적이었으나 전역이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롬멜의 견해에는 곧 동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파울루스는 독일 아프리카군단이 토브룩에 대한 무의미한 포위공격을 중단하고 대신 이탈리아군에게 맡기는 것을 제안했다. 즉 가잘라(Gazala)로 후퇴하라는 것이다. 롬멜은 그리스 전역이 끝난 뒤 영국군이 이집트에 들어오면서 토브룩 외곽에 있는 자신의 부대가 드문드문 보일 정도로 영국군 병력이 충원된 것에 분통을 터뜨렸다.


4월 30~31일에 마지막 공격을 가한 롬멜은 전차 35대를 잃으면서 가까스로 경계선의 서남쪽 모퉁이를 깨뜨렸다. 그러나 보급과 예비병력이 줄어드는 시점에서,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공격은 크게 성과를 내지 못했다. 5월 6일이 되자 이제 롬멜은 지속적인 슈투카 공격과 토브룩 내부의 물 부족이 연합군의 사기를 떨어뜨릴 것이라는 희망을 접기 시작했다. 아마 롬멜도 깨달았겠지만 그것은 가망 없는 소망이었다. 영국군은 동쪽에 있는 롬멜의 주요 전선을 공격해오기 시작했고, 이런 공격은 곧 롬멜이 절망적인 상황을 벗어나 그의 장기인 치고받는 기동전으로 돌아갈 구실을 주었다.


절정의 롬멜
롬멜을 키레나이카 밖으로 쫓아낸 영국군은 ‘여우’에게 사막전 사상 가장 큰 패배를 안겨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쓰라렸지만 패배에 대한 이탈리아군 최고사령부의 조소는 참기 힘든 모욕이었다. 롬멜은 엘 아게일라와 이집트 국경 사이에서 계속되는 기묘하고 시소게임 같은 전쟁의 한가운데로 돌아왔다.


유일한 보급로이자 영국군 쪽으로 가는 진격로인 해안도로가 해변의 모래언덕과 내륙의 소금늪지 사이로 난 좁은 회랑지대를 통과해야 하는 덕분에 엘 아게일라에서 롬멜은 천연의 방어선을 얻었다. 이곳의 또 다른 이점은 트리폴리의 주요 보급기지로부터 단 이틀 거리에 있다는 점이었다. 롬멜의 보급 상황은 나아진 반면 영국군은 오랜 진격 끝에 연료와 식수, 예비병력과 보충병의 고갈을 겪는 중이었다. 승부의 무게추가 다시 움직일 때가 온 것이다. 공격할 최적의 시점을 기다리는 데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던 롬멜은 적군에게 불쾌한 기습을 발동할 참이었다. 무능한 지휘관이었다면 아마도 반격을 개시하기 전에 엘 아게일라에서 때를 기다리며 부대를 쉬게 했을 것이다.


확실한 승리를 경험한 영국군은 다시 자만하게 되었다. 오친렉(Claude Auchinleck, 중동지구 총사령관)은 롬멜이 크게 좌절하여 상당한 기간 동안 새로운 공격작전을 발동할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영국군은 1942년 2월에 시작될 새로운 공격 ‘아크로뱃 작전(Operation Acrobat)을 준비하는 데 골몰했다. 이 작전은 트리폴리를 점령하여 사막전을 완전한 승리로 마무리지으려는 것이었다. 이 작전은 전혀 성공하지 못했지만, 리델 하트의 표현에 의하면 결과적으로 완전히 처지가 바뀐 영국군을 가잘라 너머까지 몇 번씩 굴리며 후퇴하게 했다는 점에서 ’공중곡예‘라는 의미의 아크로뱃은 아주 적절한 작전명이었다.


양측은 이전의 손실을 채워줄 새로운 전차와 부대를 지원받았다. 두들겨 맞아 널브러진 제7기갑사단은 지휘관 캠벨(Campbell) 장군을 잃었고, 그의 죽음은 부대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메서비 장군이 캠벨의 뒤를 이었으나 그는 기갑전 경험이 거의 없었다. 제7기갑사단을 대체하기 위해 영국군 최고사령부는 완전히 새로운 부대인 제1기갑사단을 150대의 신형 크루저 전차와 함께 사막에 파견했다. 문제는 부대원들이 사막 환경은 고사하고 전차전과 기계화전에 거의 경험이 없는 기병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이었다.


롬멜은 그렇게 많은 전차와 부대원을 지원받지는 못했지만, 1월 5일이 되자 6대의 수송선으로 이루어진 수송선단이 3호전차와 4호전차 55대를 가져왔다. 3호전차 19대는 장포신 55밀리 포를 장비한 J형이었는데, 장포신 55밀리 포는 단포신 주포에 비해 장갑 관통력이 50퍼센트 이상 상승되었다. 오친렉의 충원 수량에 비하면 롬멜의 보충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새로운 공격을 준비하기에는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1월 12일, 111대의 전차를 보유한 롬멜은 이제 예고 없이 공격을 감행할 채비가 완료되었다.


또 하나의 기발한 전술 가마솥
롬멜의 새로운 전술은 전례 없는 독창적인 것이었다. 그는 곧 다가올 피할 수 없는 리치(Ritchie)장군의 공격에 대비해 전차와 병력을 둘러싸서 보호하는 가마솥 모양의 수비 원진(圓陣)을 고안했다. 방어진은 서둘러 매설된 지뢰와 대전차포, 그리고 성능이 뛰어난 88밀리 고사포로 이루어졌다. 임시로 크뤼벨 부대의 지휘를 맡은 롬멜은 대담하게도 리치가 ‘가마솥’ 방어진을 공격하도록 유도해 전차를 소모하게 만들어놓고, 자신은 가잘라 방어선의 초소들을 겨냥하고 있었다. 이 초소들은 ‘가마솥’ 안에 있었고, 이제 롬멜은 여기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롬멜의 첫 번째 표적은 교묘한 기습으로 심기를 건드리던 제150여단의 초소였다. 초소들이 좀 오래 버텨주기만 한다면 리치는 자신의 병력과 초소 사이에 있는 롬멜을 쳐부술 수 있을 것이고, 결국 ‘여우’를 항복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시나리오가 실현되려면 리치는 롬멜이 초소를 괴멸시키기 전에 기갑전력을 모아 집중공격을 퍼부어야 했다. 이는 롬멜의 입장에서는 리치가 행동을 개시하기 전에 제150여단을 분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가마솥’ 안쪽은 형편이 좋지 않았다. 사실 롬멜과 부대원들이 식수 부족을 겪고 있어 상황은 빠르게 악화되고 있었다. 포로로 잡힌 인도군의 지휘관인 영국군 아처 쉬(Archer Shee) 소령이 부하들이 충분한 식수를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고 불평하자 롬멜은 이렇게 받아쳤다. “당신네들은 나와 아프리카군단이 받는 것과 정확히 같은 양, 반 컵의 물을 배급받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 갈 수 없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만일 우리가 오늘 밤 수송대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리치 장군과 타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롬멜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는 더 늦기 전에 상황을 타개해야 했다.


영국 북부에서 온 병력으로 이루어져 있던 제150여단은 헤이던(C. W. Haydon) 대령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그 150여단이 이제 적에게 둘러싸여 다른 제8군 병력에서 고립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 부대원은 낙담했고 사기는 몹시 저하되었다. 리치가 6월 3일까지 공격을 개시하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외부에서 제8군의 다른 병력이 구출해줄 희망은 거의 없었다. 다른 초소로부터 도움을 받을 가망도 없었다. 더구나 6월 3일은 너무 늦다. 완전히 고립된 헤이던은 홀로 사나운 아프리카군단의 최대 병력과 마주하게 되었다.


5월 30일, 공격준비를 하고 있던 독일군 공병대는 영국군이 매설한 지뢰밭에 통로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수비대의 엄청난 포화로 실패하고 말았다. 밤 동안 영국군은 독일군의 접근을 막기 위해 위력수색을 실시했다. 다음 날 새벽 슈투카가 물밀 듯이 휩쓸고 지나갔고, 초소는 먼지와 모래, 파편의 두터운 더미에 뒤덮였다. 이런 자연적인 연막은 공병대가 지뢰밭에 침투할 때 좋은 위장이 되었다. 그 다음은 전차대가 으르렁거리며 행동을 개시했다. 전차대는 초소로 돌진하여 영국군의 25파운드 대전차포를 박살냈다. 오후가 되자 수비대의 필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초소는 독일군에게 함락되었고, 3000명의 병사와 124대의 야포, 101대의 전차가 나포되었다. 유일하게 롬멜을 실망시킨 것은 놀라운 수비를 보여준 용감한 헤이던 대령에게 경의를 표할 수 없었다는 점뿐이었다. 헤이던 대령은 대부분의 부하들과 함께 전사했다.


이는 만만치 않은 적과 마주하게 된 독일 아프리카군단에게 생존의 가능성을 보장해주는 중요한 승리였다. 리치가 제150여단을 구하기 위해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고 전멸하도록 방치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오친렉은 리치에게 공격명령을 내렸다. 리치는 6월 2일이 되어서야 뒤늦게 공격을 개시했다. 롬멜의 88밀리 포와 막강한 대전차 방어 앞에서 학살이 벌어졌고, 불타는 전차들이 산더미를 이루었다. 공격의 강도는 너무 약했고 너무 늦어버렸다. 롬멜은 가잘라 방어선을 깨뜨리고 서쪽으로의 활로를 열었다. 이에 따라 중요한 물과 식량, 휘발유를 지원받을 수 있는 보급로가 확보되었다.


몰락
롬멜은 전력을 다했지만 몽고메리(Bernard Montgomery)가 덮치려 하는 덫에서 달아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마지막까지 영리했던 ‘사막의 여우’는 전투를 계속함으로써 자신과 부대를 구해냈다. 그러나 롬멜은 현실주의자였으며 실용주의적 마인드를 지닌 직업군인이었다. 그는 재앙의 전조를 읽을 수 있었고 독일이 전쟁에서 패할 것도 알았다. 그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엘 알라메인에서의 교훈에도 불구하고 늘 그랬듯 롬멜은 충성스러운 군인정신으로 계속 싸우는 쪽을 택했다. 이런 결정은 더 깊은 좌절을 가져왔고, 점점 늘어만 가는 히틀러의 편집증적인 고집, 양보도 타협도 없는 태도는 롬멜을 패배주의자로 만들면서 예전의 우상에 대해 더 공공연하게 반항적이 되도록 했다. 결국 롬멜은 총통각하의 관심사보다 국가의 이익에 봉사하기로 결정했고, 그리고 이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잃게 되었다. 1942년의 후반기부터 ‘여우’뿐만 아니라 독일 전체에게 시간은 다해가고 있었다.


위대한 퇴각
롬멜은 푸카(Fuka)에 일시적인 ‘정지선’을 설정했다. 그리고 몽고메리는 자신의 전차대에게 적을 추격하기 시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늘 그렇듯 영국군의 진격은 느리고 우유부단했다. 그 바람에 몽고메리는 패배한 롬멜 군대의 잔여병력을 쓸어 담을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적군의 숫자의 무게로 자신의 퇴각을 정당화한 ‘여우’는 어떻게 하면 자신의 소중한 부대를 구해낼 수 있을 것인지를 궁리하면서 잠을 설쳤다. 물론 롬멜은 예전에도 어려운 상황에 처한 적이 있었다. 1년 전에도 그는 독일 아프리카군단을 키레나이카에서 큰 어려움 없이 빼냈었다. 그러나 이번이 다른 것은, 롬멜이 희망을 잃었다는 점이다.


11월 3~4일 밤 사이에 영국군 기갑부대가 주춤거리는 바람에 롬멜의 부대를 잡을 기회를 놓쳐버렸다. 11월 5일에도 비슷한 기회가 날아갔다. 영국군은 새벽에 푸카에 도착했고,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은 2만 명의 이탈리아군과 1만 명의 독일군을 포로로 잡았다. 대체로 영국군의 진격은 서투르면서 지나치게 신중했다. 전차의 진격은 늘 있는 연료부족으로 지연되었고, 신은 롬멜의 편에 있는 듯이 보였다. 11월 6일 오후에 사막에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강한 호우가 진흙사태를 일으키더니 먼지 날리던 ‘도로’를 진창으로 바꾸어놓고 말았다. 롬멜은 탈출에 성공했다.


튀니지, 교두보 또는 함정
연합군의 침공은 히틀러와 독일군 최고사령부에게는 상당히 불쾌한 기습이었다. 연합군은 이미 모로코와 알제리를 제압했지만, 히틀러는 어떻게 해서든 튀니지를 지키겠다고 결심했다. 많은 것이 위험에 처해 있었다. 비시정부와 북아프리카 식민지의 몰락은 이탈리아의 필연적인 붕괴를 예고하고 있었다. 만일 연합군이 싸움 없이 튀니지를 점령하게 된다면, 롬멜의 군대가 항복해야 함은 물론 시칠리아까지 연합군의 침공을 받게 될 것이다. 이는 무솔리니의 몰락과 전쟁에서 이탈리아가 탈락하게 됨을 의미할 뿐 아니라, 히틀러의 제국에서 남쪽지역 전체가 와해됨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1월 25일 롬멜 휘하의 네링 장군이 튀니지에 도착하여 새로이 편성된 제90군단의 전술본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한쪽으로는 검게 도색된 융커스 Ju52s(군용수송기)가 시칠리아와 아프리카 해안을 정기적으로 왕복하며 매일 1000명의 추축군 병사를 튀니지로 실어 나르고 있었다. 히틀러는 진심으로 튀니지를 지키고 싶어 했다. 또한 롬멜과 같은 깊은 실망거리를 피하는 데 골몰하던 그는 자신의 새로운 부대 지휘관으로 두 명의 보수적인 장군을 임명했다.


롬멜은 튀니지 방어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지만 보급과 증원 병력의 부족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제5기갑군에서는 하인츠 지글러(Heinz Ziegler) 중장이 명목상 위르겐 폰아르님(Jurgen von Arnim) 대장의 휘하에서 복무하게 될 예정이었다. 동부전선에서 제39기갑군단의 사령관으로 복무했던 지글러는 그 끈질기고 꾸준한 에너지로 히틀러를 매료시킨 것이 틀림없었다. 아르님은 롬멜과는 달리 보수적이고 완고한 구식의 프로이센 융커(Junker)계층 장교였다. ‘사막의 여우’와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충돌을 빚을 게 뻔했다. 지글러와 아르님이 항공기편으로 동프로이센에 위치한 히틀러의 라스텐부르크(Rastenburg) 본부에 도착했다. 그들을 맞은 카이텔은 정예인 헤르만 괴링 사단을 포함한 3개 기갑사단과 3개 차량화 사단과 함께 병력과 전차도 계속해서 제공해주겠다고 말했다. 아르님은 보급선에 대해 불안하고 회의적이었지만, 자신이 원하는 보급품만 주어진다면 튀니지는 실용적인 교두보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늘 가장된 낙관주의자였던 히틀러는 아르님에게 전혀 걱정할 것이 없으며 보급품은 곧 도착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히틀러의 이 결정이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좌절보다 더 거대한 재앙을 낳을지도 모른다는 진실로부터 나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롬멜은 이런 대규모 자원과 병력이 전역의 초기 단계에 도착하지 않았던 이유가 궁금했다. 만약 그랬다면 독일군의 승리는 보장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너무 늦었다. 그저 이탈리아의 몰락과 유럽 본토에 연합군이 주둔하는 것을 모면하기 위해서 귀중한 자원들이 이미 적의 손에 떨어진 전선에 투입되고 있었다. 수많은 병사들이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희생되고 있었다. 아프리카 집단군에게 재앙의 전조는 이미 나타나 있었다. 엘 알라메인 이후 사실 그런 결과는 필연적이고 당연시되고 있었다. 히틀러를 거역하면서까지 위대한 퇴각을 감행함으로써 완전 전멸로부터 자신의 부대를 구하려 했던 롬멜이 확실히 옳았다.


몽고메리는 제7기갑사단과 뉴질랜드군 사단으로 구성된 특별 추격군을 편성했다. 당시 롬멜의 병력은 약 5000명의 독일군과 후위를 방어하는 2500명의 뛰어난 이탈리아군 전투부대로 줄어 있었다. 롬멜은 엘 아게일라에서 진격하는 영국군을 막을 수 있기를 바랐다. 롬멜은 부대원들에게 영국군의 전진을 지연시킬 수 있도록 저지선 사이에 두터운 지뢰지대를 설치하라고 명령했다. 지뢰가 부족했던 독일군 공병들은 깡통과 여분의 헬멧으로 위장하여 가짜를 만들었다. 이것도 모래에 섞여 있으면 진짜 지뢰처럼 보였다.


영국군은 11월 20일 벵가지에 입성했다. 몽고메리는 보급과 트리폴리로의 대규모 진격에 대비하여 부대를 재편성하기 위해 영국군 제8군에게 정지명령을 내렸다. 보급에 신경쓰지 않고 사막을 가로질러 미친 듯이 돌격하는 것은 몽고메리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만일 롬멜이 영국군 제8군을 지휘했다면 상황은 달라졌겠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롬멜과 그의 지친 부대원들은 3주간의 귀중한 휴식을 얻을 수 있었다. 12월 12일이 되어서야 영국군은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새벽 독일군은 메르사 브레가를 포기했다. 이어 12월 15~16일에도 영국군의 전위 부대와 독일군의 후위 부대는 해안도로를 따라 계속해서 충돌했다. 이때 가장 중요한 전투가 메르두마(Merduma)에서 발생했다. 12월 17일 롬멜 부대의 본대는 탈출했지만, 뉴질랜드군과 독일군 사이의 전투는 메르사 브레가에서 12월 18일까지 계속되었다. 엘 아게일라 전투는 이렇게 종료되었다.


엘 아게일라가 함락된 후 이제 롬멜의 중요한 임무는 트리폴리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롬멜과 히틀러는 이런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에 있어 상당히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동맹국을 곤경에서 구해내고 또 정치적인 위신도 세워야 했기 때문에 리비아의 이탈리아령을 가능한 한 많이 지켜내고 싶었던 히틀러는 롬멜에게 보우에라트(Bouerat)에서 물러서지 말고 저항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곳은 천연의 엄폐물이 없는 빈약한 방어선이라 남쪽에서부터 우회공격을 당할 수도 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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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멜은 홈스(homs)와 타루나(Tarhuna) 사이에 있는 더 좋은 방어선을 찾아냈다. 이 방어선은 트리폴리 남쪽에 있는 제벨 나푸사(Jebel Nafusa)의 낮은 언덕을 따라 이어지고 있었다. 이곳에서 롬멜은 몽고메리의 느린 진격 덕분에 방어를 강화하여 진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더 나은 선택지는 제쳐놓고, 롬멜은 또다시 쓸모없고 의미도 없는 저항을 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수행해야 했다. 이번에는 보우에라트였다. 엘 알라메인에서의 명령 “계속 저항하라”의 완벽한 반복으로, 이제 독일 아프리카군단은 완전히 같은 결과만 남겨두게 되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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