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이 가져다주는 ‘침묵’이라는 힘
깊은 고독이 성장의 밑거름이 될까
고독을 꿰뚫어 보고 이해해야만,
인생의 참모습을 마주할 용기가 생긴다.
감정을 적극적으로 다루고,
고독을 긍정적인 힘으로 바꿔야 한다.
고독의 첫 번째 형태는 ‘능동적 고독’이고, 두 번째 형태는 ‘수동적 고독’입니다. 늘 곁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떠나면 고독감이 밀려듭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어머니 곁을 떠나거나 부부가 떨어져 있게 될 때 상실감에 시달립니다. 순풍의 돛 단 듯 잘 나갈 때는 다들 문턱이 닳도록 찾아오고 그저 “네 말이 옳다.”라고 해 주지만, 곤경에 빠지면 누구 하나 돌아봐 주지 않고 가족조차 남남이 되고 맙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독감이 들면 친지와 대화를 나누고, 의지할 사람조차 찾기 힘들면 반려동물이라도 곁에 두려 하지요. 이처럼 감정적으로 의지할 데 없이 외로워하는 것은 수동적 고독입니다.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해 느끼는 외로움도 수동적 고독에 속합니다.
고독의 세 번째 형태는 ‘사상적 고독’입니다. 지적 수준이 유달리 높거나 깊은 사고를 하는 사람은 세상을 보는 시각이 남다릅니다. 그러다 보면 늘 ‘나만 깨어 있다’라는 느낌을 받고 성급히 자신의 포부와 이념을 밝히려 하며, 남들과 대화할 때도 ‘세상을 구할 방법’에만 초점을 맞추어 알아듣는 사람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삶을 극단적으로 대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멱라강(汨羅江)에 몸을 던진 굴원(屈原)과 유명한 혁명가 중 몇몇도, 공감과 지지를 얻지 못해 결국 열사(烈士)가 되었지요. 내면의 고독을 다스릴 줄 몰라 원대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죽음을 결심하며 “원하는 바를 이뤘다.”라고 자신을 위로했습니다.
네 번째 형태는 ‘권력의 고독’입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그로 인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누구 하나 감히 조언해 주려 하지 않을 뿐더러, 진심으로 대화할 사람도 곁에 없습니다. 일부러 몸을 낮추고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려 해도 모두 눈을 피하기만 합니다. 어쩌다 찾아오는 사람도 뭔가를 물어보거나 부탁하거나 기대려는 의도가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그저 습관적으로 아첨하려 합니다. 그래서 온종일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어도 내면은 항상 공허합니다.
가장 전형적인 예로 고대 황제가 자신을 부른 호칭인 ‘고가(孤家)’를 들 수 있습니다. 황제의 삶은 고독 그 자체였습니다. 황제를 모시는 것은 호랑이를 모시는 것과 같았으며,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그대로 황천길로 갈 수도 있었지요. 그러니 누가 감히 황제를 진심으로 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따라서 권력과 고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였습니다.
고대 전제 군주제 사회에서 이런 권력으로 인한 고독감은 군주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이처럼 권력을 가졌다고 고독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강한 권력을 가졌다고 타인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며,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경영자 중에는 아직도 독단적인 성향으로 인해, 고대의 황제 못지않게 외로운 사람도 있습니다.
앞서 말한 네 가지 형태의 고독을 꿰뚫어 보면 인생의 참모습을 더 용기 있게 마주할 수 있습니다. 어떤 형태의 고독이든 잘 다루지 않으면 부정적이거나 극단적인 생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감정을 적극적으로 마주하고 잘 처리하는 방법을 알면, 고독이 오히려 긍정적인 힘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자유보다 중요한 것은 자재이다
자율이 자유를 가져올 수 있을까
만사에 지나치게 엄격하면
스스로 자신을 옭아매어 자유로울 수 없다.
나는 개인의 품행은 물론이고 시간 관리나 처세에 있어서 ‘규범과 규율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굳게 믿어 왔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자신을 옭아매고 가두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성엄 스님의 말씀에 정신이 번쩍 들었고,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현대인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끼는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시간에 쫓겨서일 수도 있고, 주머니가 얄팍한 탓일 수도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고,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없어서일 수도 있지요. 자신에게 높은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조차도 과거의 내가 그랬듯이, 타인의 기대에 너무 신경 쓰거나, 자신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며 ‘기대에 못 미칠까 봐’ 걱정하고 부자유하다고 느낍니다.
성엄 스님의 말씀에 따르면, 자유롭고 편안한 경지는 두 가지 수행의 힘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는 ‘번뇌를 내려놓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대를 버리는 것’입니다.
번뇌가 많은 사람은 만사에 생각이 너무 많아 주변은 돌아보지 않고 자신을 옭아매는 데만 열중해 스스로 좁은 틀 안에 갇힙니다. 예를 들면, ‘시간 안에 목표를 완수해야 한다’라고 닦달하거나 ‘특정 상황에서 어떤 임무를 반드시 해내야 한다’라고 몰아붙이며 자신을 틀 안에 가두는 것이지요.
성엄 스님도 젊은 시절에는 자신에게 너무 엄격해 스스로 옭아맨 탓에 자유롭지 못했으나, 수행을 통해 ‘목표를 위해 자신을 옭아매는 것은 어리석은 짓’임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 옛날 자신을 옭아매던 성엄 스님은 이미 자신에게서 해방되어 세월의 흐름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이건만, 내 안에는 아직도 꽁꽁 묶인 내가 살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참 순하고 신중하지만 자유롭지는 않습니다. 나는 지나친 규율 탓에 옴짝달싹 못 하는 나를 풀어 주고 싶습니다.
자신에게 엄격한 것은 바람직하지만, 할 일을 마친 다음에는 인연의 변화에 순응해 자유롭게 풀어 주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보다 ‘적당한 정도에서 만족하는 것’이 더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습니다.
자신을 몰아세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앞으로 벌어질 일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주변 환경, 건강 상태, 생활 여건, 보유 자원 등에 변화가 올 텐데, 미래를 정확히 내다보기란 불가능하지요. ‘다 잡은 물고기’라고 확신했다가 놓치는 일이 다반사고, 오히려 뜻밖의 인연을 통해 생각지도 못한 것을 얻기도 합니다.
스스로 몰아세우고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것은 자신을 함정에 빠트리는 것과 같이 안타깝고 가여운 일입니다. 내려놓는 법을 배우려면, 시간과 범위를 정해 놓고 과도한 목표나 제 능력 밖의 일을 해내라고 스스로 다그쳐서는 안 됩니다.
목표를 분명히 정하고,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다.
자질구레한 것으로 자신을 옭아매지 말고,
융통성을 발휘할 여지를 남겨 둬야 한다.
만약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한다면, 관대하게 받아들이고 유연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가짐, 시간, 일, 나아가 모든 상황에서 벗어나세요.
성엄 스님은 “스스로 자신을 옭아매고 가두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내 안의 지치고 불안한 나에게 봄바람처럼 따스한 위로를 안겨 주었습니다. 성엄 스님이 말한 자유는, 오래 수행을 통해 얻은 내공에서 비롯된 것이었지요. 아울러 이처럼 착실히 다진 기초는 확고한 자신감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자신감이 부족했던 나는 자신을 아득바득 몰아세웠습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자기를 몰아세우지 않으면 다 망치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과 염려는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불러옵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충분한 자신감입니다. 자신감이 있으면, 적절한 시기에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자아, 무아로 나아가기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방향을 틀어야 할까
장애물이 주는 가장 귀한 선물은
용감히 뛰어넘을지, 방향을 틀지를
판단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시도하다가 벽에 부딪히면, 방향을 트는 법을 배울 수도 있고 귀인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성엄 스님은 ‘글을 써서 투고하고 퇴짜맞는’ 훈련을 했습니다. 글이 퇴짜맞아도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되돌아온 원고를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예전의 편집자들은 성실하게도 돌려보내는 원고에 꼭 조언을 써 주었지요. 성엄 스님은 전 《대중일보》 문화면 편집장이었던 쑨루링(孫如陵) 씨가 기억에 남는다면서, 매우 열정적이고 전문적인 사람으로 꼽았습니다. 그가 돌려보낸 원고에 써 둔 조언은 스님을 더욱 분발하게 했습니다. 스님은 방송통신학교에 등록해 독학으로 문예 창작을 배워 글쓰기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다 보면 벽에 부딪히게 마련입니다. 장애물을 극복하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할 때도 있고, 그 길이 막다른 곳임을 깨닫고 곧바로 방향을 틀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인생은 소중해요. 이런저런 시도를 하면서 자신의 잠재력과 장애물을 파악해야 합니다. 성엄 스님은 젊었을 때 노래도 하고 피리도 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몇 번 해 보니 폐활량이 부족해 이쪽으로는 더 발전할 수 없다고 느꼈답니다. 그래서 곧바로 방향을 틀어 글을 읽고 쓰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이는 스님이 바라는 자아의 발전 방향에 맞았습니다.
타고난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이든, 약점을 개선하는 것이든 모두 자신감의 표현입니다.
마음을 돌리고 내려놓기를 배우다
좋은 일을 하고도 대접받지 못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선의로 한 일인데도 아니꼬운 시선을 받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찬탄하는 이들도 있지만, 의혹을 제기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 능력을 잘 알고, 성취 여부를 장담할 수 없더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더욱 분발하면 서서히 진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자비는 자신이 가진 능력과 자원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 데서 시작됩니다. 제 능력과 자원을 파악해 얼마만큼의 일을 할 수 있는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능력과 자원이 부족하다면 키우기 위해 힘써야지, 무턱대고 제 능력 밖의 일을 맡아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이 마음을 돌리는 과정에서 옳지 않거나 급진적인 방법을 택하기도 하고, 방해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기도 합니다.
잘못된 관념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버리는 것이 얻는 것’이라는 말만 귀에 담아, 버림과 동시에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하고 욕심을 품습니다. 이 또한 마음을 돌리는 과정에서 흔히 걸려드는 덫입니다.
성엄 스님은 “사적인 욕심을 버리면 실체가 있는 물건을 가지거나 무형의 성취를 이루는 게 아니라, 이타심을 얻는다.”라고 했습니다.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더라도 번뇌가 사라질 뿐,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반야심경』에 이르기를, “지혜도 없고 얻을 바도 없다.”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지혜도 없고,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는 말입니다. 부처가 된다고 해서, 모두가 우러르는 위대한 자리에 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부처가 되면 스스로 부처라고 여기지 않기에 다시 속세로 돌아가 보살의 몸으로 중생을 제도하게 됩니다.
‘버리는 것이 얻는 것’이라는 말에는 버림과 얻음이 있습니다. 진정 번뇌에서 벗어난 사람은 버리기만 할 뿐 얻으려 하지 않습니다. 얻고자 하는 욕망이 없어야 비로소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버릴 각오만 있고
얻을 욕심이 없어야만
비로소 번뇌까지 내려놓을 수 있다.
참회와 용서로 자신에게 너그러워지기
무심코 저지른 잘못이라도 뉘우쳐야만 할까
잘못을 뉘우치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많은 이가 나약한 내면을 감추기 위해 차라리 회피하고 맙니다. 잘못을 알면서도 인정할 용기가 없는 사람도 있고,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엄 스님은 “참회는 매우 중요한 수행입니다. 이는 수행 과정에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2;
잘못을 저질러 남에게 상처를 입혔다면 당연히 참회해야 합니다. 잘못한 것 같지 않더라도 상대방이 언짢아할 때도 참회해야 합니다.
때로는 좋은 뜻으로 한 행동이나 무심코 한 말이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럴 뜻은 티끌만큼도 없었더라도 참회해야 하는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만난 옛 친구에게 근황을 묻고 가족의 안부를 물었다고 해 봅시다. 그런데 하필 그가 빚더미에 올라 가족과 떨어져 지내고 있다면 호의로 건넨 말이 비꼬는 말로만 들릴 것입니다. 그로 인해 상대의 감정이 상했다면 당연히 참회해야 합니다.
참회는 무심코 벌어진 일에 마음 상한 사람에게 사과하고
상대방이 입은 피해를 보상하며,
다시는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상대방의 이해와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벌어진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학생이 선생님의 평가에 앙심을 품고 무려 20년 동안 보복을 감행한 이야기였습니다.
선생님은 졸업을 앞둔 학생이 기백이 넘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성적표에 “도량을 키우라.”라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학생은 이를 모욕으로 받아들여 앙심을 품은 것이지요. 그로부터 20년 동안, 학생은 밤마다 장난 전화를 걸어 선생님을 괴롭혔습니다. 그로 인해 밤에 걸려 오는 전화는 아예 받지 못할 정도로 두려움에 떨던 선생님에게 결국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의 어머니가 병으로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가자 친척들이 전화를 걸었는데, 선생님은 또 장난 전화인 줄만 알고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선생님은 어머니의 임종을 지킬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학생은 자그마치 20년이나 선생님을 괴롭힌 끝에 찾아가 용서를 빌었습니다. 선생님 또한 자신의 말이 오랫동안 학생을 괴롭혔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며 잘못을 반성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 신중하게 말을 고르기로 다짐했습니다.
사랑하기와 사랑받기
사랑에서 자비로 이어지는 것은 불가능할까
예전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기껏해야 내가 준 사랑과 관심에 대한 보답을 바라지 않는 수준이었을 뿐, 대상을 나누지 않고 평등하게 사랑하지는 못했습니다. 사랑이 자비의 차원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안 뒤 몹시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나 또한 그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지요.
어머니께서 중풍으로 병상에 누워 계신 지 거의 30년이 다 됐습니다. 그래서 난 늘 어머니를 돌볼 간병인을 고용해야 했습니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일하는 그들의 처지가 안타까워, 지내는 데 불편하지 않도록 가족처럼 살뜰히 챙겼고, 내 허리띠를 졸라맬지언정 그들에게는 무엇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우리 집을 거쳐 간 간병인 중에는 부지런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도 있었고 설렁설렁 일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차별하지 않고 깍듯이 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 모두를 보살로 여기고 은혜에 감사했지요. 그러나 어찌 됐든 그것은 내 어머니를 돌봐 주는 사람들에 대해 품은 마음이었습니다. 늘 주변을 어지르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이웃을 사랑과 웃음으로 대하라고 한다면, 나 역시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내게 성엄 스님은 자애롭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비심은 원래 가까운 데서 먼 데로,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얕은 데서 깊은 데로 키워 가는 것입니다.”
능력에 맞게 서서히 키워 가면 됩니다. 가정을 잘 돌보고, 모든 가족 구성원을 똑같이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하세요.
진정한 자비란,
상대방이 원할 때, 나의 호불호에 상관없이
줄 수 있는 만큼 기쁘게 주는 것이다.
내 눈에 예쁘다고 더 사랑하고, 밉상이라고 덜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말로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식을 차별하는 부모가 적지 않은데요. 이는 자비와 거리가 멉니다. 말 잘 듣는 아이만 예뻐하고 청개구리처럼 거스르는 아이는 내친다면, 자비심이 부족한 부모입니다. 진정한 자비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적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원심을 내는 것이 생명의 귀착점이다
인생의 고통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성엄 스님은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관점에서 우리가 겪는 괴로움을 보자면, 빚을 갚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과거세인지는 모르나, 우리가 빚을 진 사람이 한두 명은 아닐 것입니다. 많은 중생에게 빚을 졌다면 마땅히 이번 생에서 갚아야 합니다. 그러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관점에서 인생의 괴로움을 보자면, ‘빚’을 갚는 것이 아니라 ‘원’을 갚는 것입니다.
어쩌면 어느 과거세의 우리가 선을 쌓고 공덕을 쌓고 타인과 우리가 사는 세상, 중생을 돕겠다고 발원했을지도 모릅니다. 혹자는 봉헌을 두고, 내세를 위한 복덕을 미리 쌓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불자는 어떤 목적을 위해 수행하지 않습니다. 그저 아주 단순하게, 번뇌에서 벗어난 뒤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수행하지요. 번뇌에서 벗어나, 중생에게도 그 이로움이 미치게 됩니다. 해탈에 이른 뒤, 타인에게 봉헌하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와 가치는 자아의 인지와 정의에서 시작됩니다.
빚을 갚는다고 하면 고통스럽게 느껴지지만, 원을 갚는다고 하면 즐겁게 느껴지지요. 빚을 갚는 것은 수동적이고 누군가의 강요와 요구에 따른 것이지만, 원을 갚는 것은 능동적으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평생을 불평만 하며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조금만 고생스러워도 불공평하다며 억울해하고, 부모, 형제, 세상이 자신을 이유 없이 미워한다고 원망합니다. 이런 사람은 평생 아무리 노력해도 인연이 아니라 원한만 맺을 뿐입니다.
반대로 안분지족하는 사람은 삶의 즐거움과 괴로움에는 다 그럴만한 인연이 있음을 알아, 타인을 부러워하지도 않고 억울해하며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평생 원한이 아니라 인연만 맺습니다.
성엄 스님은 좋은 인연을 많이 맺으라고 권합니다. 형제자매, 부모, 친구, 동료가 서운하게 하더라도 원망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헌신할 방법을 생각하세요. 자신의 시간과 재력, 체력을 다해 남을 이롭게 하면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습니다. 인연의 관점에서 성찰하면, 과거에 좋은 인연을 많이 맺지 못했기에 지금 억울한 일을 겪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좋은 인연을 많이 맺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고통을 받아들이고 마음을 돌려라.
원한이 아닌 인연을 쌓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