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끊어내다, 단사번뇌(斷捨煩惱)_ 금강경』을 통해 바라보는 인생의 과제들
타인과의 경계는 ‘실선’이 아닌 ‘점선’으로 이뤄진다
삶은 번민의 연속이다. 그중 대부분은 인간관계와 관련한 것이다. 개인 심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들러도 “인간의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한다.”라고 말했다. 이후 그의 주장을 근간으로 번민에서 벗어나 ‘진정한 나 자신’으로 살려면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하다는 심리학자들의 이론이 등장하면서 대중의 전폭적인 관심과 지지를 얻었다. 우리가 마음속에 꿈꾸는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세상과 적을 지며 기꺼이 미움받기를 자처하면 정말 행복할까? 과연 그게 최선일까?
S는 회사원이다. 그는 얼마 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상사는 꼭 퇴근 시간 직전에 그에게 긴급한 업무를 지시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임무를 완수했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그런데 자꾸만 하다 보니 조금씩 불만이 생겼다. 그는 아마도 자신이 아직 결혼을 안 한 싱글이라서 상사가 제멋대로 지시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아니면 본인이 ‘부려 먹기’ 쉬운 만만한 대상이라 그런 것으로 단정했다.
평소 심리학에 관심이 많아 다양한 심리 관련 서적을 읽은 그는 ‘타인과의 경계’라든가 ‘과제의 분리’¹와 같은 개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 자신의 업무가 아닌 누군가의 ‘과제’는 당당히 거절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상사의 업무 지시에 부당함을 호소하며 모든 직원을 공평하게 대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상사는 그의 요구를 받아들였으나, 얼마 후 동료들 사이에서 그에 관해 좋지 않은 소문이 떠돌았다. 결국 불만과 원망을 품은 채 다른 회사로 옮기게 되었다.
이직에 성공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대외 행사에 참석해 업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새로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전 회사의 상사가 특별히 그를 눈여겨 보고 승진과 연봉 인상을 위해 여러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는 것이다.
만감이 교차했다. 회사를 나오던 그날을 떠올렸다. ‘정말 잘한 결정이었을까?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예컨대 내 체면도 지키면서 상사와 대화로 잘 푸는 방법 같은 것도 있었다. 그는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경계’를 세운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팀원들을 배려하면서 상사와 적극적으로 소통했다면 팀워크도 좋아지고 화기애애하게 분위기를 이끌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 그러면 본인이 원하는 대로 전체적인 상황을 조화롭게 리드할 수 있었을 거라는 후회, 열등감과 자기 의심에 가득 차 상사가 자신만 차별한다는 혼자만의 느낌을 버렸어야 한다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금강경』에서는 위의 상황처럼 인간관계에서 비롯한 번뇌에서 벗어나려면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를 없애고, ‘너’와 ‘나’ 그리고 ‘타인’을 구분 짓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야 괴로움에서 벗어나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것이다.
나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도울 수 있다
『금강경』은 고통과 번민에 허덕이는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담은 경전이다. 주로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 새롭게 나를 인식해야 하며, 우리의 일상을 잠식하는 대부분의 근심과 걱정은 일어나지 않을 망상과 환상이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 다시 말해 우리가 고집스럽게 믿으며 놓지 못하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 실제는 ‘허상’이라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타인과의 경계, 혹은 너와 나 사이를 가로지른 벽은 평소 내가 ‘옳다’고 철석같이 믿어 온 그 관성을 깨뜨릴 때 비로소 허물어진다고 말한다. 조건 없는 사랑과 선행은 타인과 나 사이에 막힌 것이 없을 때 행해지기 때문이다. 즉, ‘이타(利他)’를 생의 사명처럼 받들며 행동할 때 비로소 진정한 인생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 때문’이라고 했던 아들러의 의견과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아들러의 저서를 읽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가 주장하는 개인 심리학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이타’라는 걸 알 수 있다. 다만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그는 ‘심리학’이라는 틀을 활용한다.
석가모니의 가르침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선행이야말로 최고 경지의 수행이며, 이 깨달음을 얻은 자는 훗날 다음 생에 윤회하게 되더라도 같은 문제로 고통받지 않는다고 했다.
삶의 가장 높은 경지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겪는 고통도, 행복도 영원하지 않다. 세상의 모든 사람과 사물은 인연을 따라 수시로 변한다. 그 어느 것 하나 독립적으로, 영원히 고정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의 집착과 아집을 내려놓으면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헌신할 수 있다. 진심에서 우러나 누군가를 위해 선을 행하면 번민의 올무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누릴 수 있다.
사랑과 자비 안에서 진정한 ‘우리’가 탄생한다
‘타인과의 경계’를 설정하고 ‘과제의 분리’까지 실천했건만, 우리는 왜 죄책감에 시달리며 여전히 관계 때문에 괴로움으로 고통받을까? 결정적인 이유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타인과의 경계’와 ‘과제의 분리’, 그 기반이 내면의 공포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공포에 대응하기 위해 택한 일종의 자기방어 기제가 ‘경계’와 ‘분리’다. 이것은 관계에서 서로를 존중할 것을 강조하지만 더 깊은 차원의 공감을 이끌지는 못한다. 그러니 사랑과 자비의 경지까지 정진할 수 없다.
상대가 내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못하는 것과, 설령 침범했다 할지라도 그것에 영향받지 않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자세다. 책상 한가운데 선을 그어 놓고 넘어오면 바로 벌을 주려는 아이들에게 서로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고 아무리 설명해 봐야 소용없다.
석가모니는 나와 타인의 관계를 구분하려는 집착을 버려야 하며, 특히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때 서로를 구분하지 않아야 한다고 권면했다. 실제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자로 그은 듯 정확한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사람들에게 경계가 존재한다면 그 사이에는 ‘실선’이 아닌 ‘점선’이 그어져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가장 강해질 때는 ‘자아’가 강해질 때가 아니라 오히려 사라질 때이다. 무릇 모든 일에 ‘나의 이익’을 앞세우지 않으면 번영이나 치욕, 이익이나 손실 따위가 그리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혹시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손해 보진 않을까?’ 하는 초조함에서 벗어날 수 있으므로 자신이 지닌 힘을 무한대로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 삶의 중요한 선택의 기로 앞에서 나의 기분이나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넓은 마음으로 생각하면 타인에게 이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것으로 내면의 근심과 공포를 뛰어넘어 진정한 나 자신을 만들어 갈 수 있다.
무아의 경지에 이르는 삶, 무아도생(無我度生)_나와 타인, 우리가 조화롭게 살아가는 방법
변화의 열쇠는 언제나 내 손안에 있다
불교 경전을 공부하고 이를 접목한 심리상담을 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많은 내담자를 만나며 다양한 사례를 들었지만, 상담이 끝날 때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다들 하는 말이 있다. “감사해요. 선생님이 제 인생을 바꿔 주셨어요.” 그럴 때마다 나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한다. “감사는요. 사실 가장 감사해야 할 사람은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다. 겸손해 보이기 위해서 하는 말도 아니다. 정말 그렇다.
고통의 심연에 빠진 사람에게는 변화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 변화를 시도하는 것, 변화를 통해 운명을 바꾸는 것은 오직 그 사람만 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슬럼프에 빠지면 그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려고 한다. 하늘을 원망하고 부모를 욕하며,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을 탓한다. 그러면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삶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다.
그들은 오랜 시간 불만족스러운 상태를 고수하며, 심지어 그런 상황에 익숙해져서 편안함마저 느낀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고통의 울타리’라고 부른다. 고통스럽긴 해도 괴로움이 익숙해진 나머지 그 안에서 안락함을 느껴, 변화를 일으키고자 하는 동기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바닥을 치고 일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사람들은 자신에게 도움을 준 주변 사람들에게도 감사해야 하지만, 가장 먼저 자기 자신에게 감사해야 한다.
인생의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개인적으로 중국과 영국에서 심리상담을 전공한 뒤 학위를 취득했지만, 대만에서 불교를 접목한 심리상담을 하려면 미국의 ‘무의식 치료법’을 접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이 시스템은 사람의 의식층을 통과해 무의식에 뿌리내린 근본적인 신념을 바꿔 놓는 것으로 실제 임상을 통해 여러 성공 사례를 확보했다. 내담자들은 이를 통해 무의식에 숨은 그릇된 잡념을 없애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
미국에서 공식 인증한 ‘무의식 치료사’ 자격증을 취득한 나는 이 훈련법이 특별히 중시하는 것, 즉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내가 있다’라는 걸 얼마나 강조하는지 잘 알고 있다. 다시 말해 무의식에 숨은 신념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담자의 무의식을 이끌어 주는 사람을 ‘코치’나 ‘스승’으로 표현하지 않고 조력자라는 뜻의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라고 부른다. 이를 ‘지도자’ 혹은 ‘촉진자’로 번역한 문헌들이 있긴 하지만, 번역이 어찌 되었든 변화의 중심에는 도움을 받는 사람, 즉 내담자가 있다. 변화의 열쇠 역시 내담자가 쥐고 있다.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의 해석에 따르면 ‘퍼실리테이터’란 조직의 협력을 도모하고, 그들이 공동의 목표를 이해하여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하는지 일깨워 주는 조력자를 뜻한다. 나는 이 개념을 심리상담에 적용하고 있다. 상담의 모든 과정은 내담자 위주로 진행한다. ‘퍼실리테이터’가 절대 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 상담을 통해 내담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는다.
변화의 열쇠는 다름 아닌 내담자 본인이 쥐고 있다. 열쇠를 본인이 들고 있으므로 더 나은 사람으로 변하고자 하는 의지와 결정, 권리를 빼앗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타인은 그저 변화를 도와주는 매개체일 뿐이다. 인생의 변화는 오로지 본인에게 달려 있다.
나를 성장하게 하는 사람은 오직 나 자신이다
석가모니가 제자 수보리에게 했던 말로, 이를 요즘 삶에 적용해 보면 비록 석가모니는 자신을 ‘나’로 지칭했으나 사실 진정한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석가모니라는 존재, 즉 ‘나’에 집착한다. 이는 ‘나’라는 실존 인물이 사람들을 구제하고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금강경』을 대표하는 단어가 바로 ‘무아’다. 그런데 만일 석가모니가 중생을 구제하고 해탈에 이르게 한 공로를 자기 자신, 즉 ‘나’에게 돌렸다면 그것은 『금강경』의 전체 가르침에 완전히 위배된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스스로 바른 생각에 이른다’라는 자성자도(自性自度)의 개념이다.
사람은 본래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평온함에 이를 수 있다.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나 가르침이 필요하지 않다. 석가모니는 모든 수행은 전부 스스로 해 나가는 것이므로, 가르침을 준 자에게 공로를 돌릴 필요가 없으며, 그에게 은혜를 갚으려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물론 나를 도와주고 협력해 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현할 수는 있으나 자신의 변화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있다.
보이는 것에 얽매이지 않고 베푸는 삶, 무상보시(無相布施)_도움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가 행복한 삶에 관하여
도움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가 행복한 삶에 관하여
어릴 적 받은 가정교육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어릴 때는 사람들이 선뜻 내어 주는 호의를 잘 받지 못했다. 남을 귀찮게 하거나 신세 지는 게 그렇게나 어려웠다. 누가 내게 뭔가를 해 주면 그 사람에게 빚을 졌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보답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어릴 때를 떠올려 보면 부모님 모두 친척이나 지인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 정작 본인들은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나서서 도와주었다. 부모님 또한 남에게 신세 지는 건 극도로 싫어해서 누군가에게 선물이나 도움을 받으면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보답하고는 했다.
나이가 들고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남에게 과도하게 친절하고 예의를 차리며 겸손하게 대하는 심리의 이면에는 ‘나는 호의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자기 비하가 깔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조금씩 생각을 바꾸는 훈련을 했다. 누군가의 호의를 기쁘게 받아들이려 노력했고, 나는 그러한 호의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존재라는 걸 의식적으로 상기했다.
물론 하루아침에 된 건 아니다. 생각을 바꾸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래도 많이 나아졌다고 느끼는 부분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때 더는 예전처럼 심한 부채감이나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단 그런 생각이 고개를 들라치면 곧바로 생각한다. ‘저 사람이 나한테 잘해 주는 만큼 나도 잘해 주면 돼.’ ‘난 저 사람의 호의를 받을 자격이 있어. 나도 저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면 돼.’
물론 어떻게든 빨리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는 지울 수 없지만, 그래도 행동은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다. 그래서 곧바로 반응하지 않고 적당한 기회가 왔을 때 적절하게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도움을 줄 때 상대의 반응을 마음대로 기대하지 마라
기업 고문 자리에 있을 때는 회사에서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심리상담을 맡아 도움을 주고는 했다. 그때 제일 많이 들었던 불만은 이런 것들이었다. “물론 제가 뭘 바라고 그 사람을 도와준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제 호의를 너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니까 좀 화가 나는 거 있죠!”
누군가를 정말 열심히 도와주었는데 상대가 그걸 너무 당연한 듯 여기면 어떨까?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건 정말이지 불공평한 일이다. 심지어 상대에게 이용당했다는 생각에 화가 나고 마음이 불편해진다.
특히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거나 공동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억울함은 극에 달한다. 나에게만 일이 과중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일은 내가 더 많이 했는데 그 공로를 고스란히 다른 사람 손에 넘겨주는 것 같아 불만이 생기기도 한다. 이럴 때는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 ‘나는 저 사람에게 어떤 반응을 기대했는가?’ ‘저 사람이 내게 무슨 말을 해 주길 바랐을까?’
정상적인 논리로 생각한다면 이런 반응을 기대한다. “최소한 고맙다는 말은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재밌는 건 정말로 상대방의 반응이 시답지 않아 서운해하는 사람들에게 그럼 당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게 뭐냐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이렇게 대답한다. “뭐, 특별한 건 없어요. 그냥 그 사람한테 도움이 됐으면 그만이죠.” “그 사람의 반응을 제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물론 이런 대답에는 어느 정도 부정적인 감정이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 말에 바로 정답이 들어 있다. 도움을 준 뒤 상대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 때마다 이 말을 되새기는 연습을 하면 부정적인 감정이 스르르 걷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가장 큰 스트레스는 사람들의 반응이 내 마음 같지 않다는 것이며, 내가 원하는 대로 그들의 반응을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특히나 누군가를 성심성의껏 도와주었을 때 굳이 뭔가 보상을 바란 건 아니지만, 상대의 반응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면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금강경』에서 석가모니는 수보리에게 보살이 중생을 위해 베푸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로 그저 본분에 충실한 것이라고 말한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니 처음부터 보상이나 보답을 원한 적이 없고, 또 그로 인해 복을 받으려고 생각한 적도 없으니, 애초에 복을 누린 적 없는 것이라 설명한다.
이러한 불교의 정신을 일상에 적용해 보자면 누군가를 도와줄 때 그에게 어떤 보상이나 보답을 바라서는 안 된다. 더 중요한 건 내가 뭔가를 했다는 생각에 잘난척하거나 으스대서도 안 된다. 그건 그저 선의를 베푸는 본분에 충실한 것이므로 상대를 위해 내가 뭔가를 해 주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상대를 도와주길 원하고, 상대도 그 도움을 받고자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완벽하게 아름다운 과정이다. 내 손길로 상대가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 나는 그걸로 어떤 복을 받게 될 것인지 등을 계산할 필요는 없다. 모든 기대를 버린 채 도와주는 사람에게 진정한 자유가 따른다. 기대라는 것 자체가 일종의 집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기대를 버리는 것은 곧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나’에 대한 바람과 집념을 최소한의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수행을 계속하다 보면 마침내 우리는 ‘무아’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때 상대도 부담 없이 도움을 받는다
어머니를 간병한 지 30여 년이 흘렀다. 당연히 무언가를 바라고 어머니를 돌보는 건 아니다. 나는 그저 내 힘이 닿는 범위에서, 자식 된 도리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하지만 저 깊은 무의식에서는 ‘정말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나?’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이에 대한 답은 어머니가 병을 얻고 10년 차 되던 해에 얻었다.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는다’라는 생각은 철저히 ‘돌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하는 것이다. ‘돌봄을 받는 사람’은 늘 미안하고 안쓰럽다. 죄책감마저 든다.
나와 어머니처럼 가까운 사이라도 그렇다. 어머니를 돌보기 시작한 10년 동안, 우리는 서로 감정적으로 많이 부딪쳤다. 가장 큰 이유는 ‘돌보는 사람’이 도움을 주면 줄수록 ‘돌봄을 받는 사람’의 죄책감이 커진다는 거였다. 이 느낌이 쌓이고 쌓여 서로에게 큰 스트레스가 되었고, 그것은 곧 억울함과 원망으로 바뀌었다.
‘돌보는 사람’은 ‘내가 이렇게까지 헌신하는데 왜 대체 맞춰 주지 않는 거야? 대체 뭐가 불만이야?’라고 생각했고, ‘돌봄을 받는 사람’은 ‘너를 힘들게 하는 내가 너무 싫어’라며 자책하고 원망했다.
가령 외출 전에 갑자기 어머니가 입으려던 외투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거나, 신발을 신었는데 작아진 느낌이면 어머니는 돌연 마음이 토라져서 “안 갈란다” 하고 방으로 쌩하고 들어가 버렸다. 그러면 나는 나대로 화가 치밀어 올라 감정적으로 대응하고는 했다.
몇 번 그런 충돌이 생긴 뒤 나는 자문했다. ‘나는 대체 뭐 때문에 화를 내는 걸까?’ 아들로서 최선을 다해 효도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몰라 주는 것 같아서? 아니면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가 안쓰러워 하루 종일 집에 있는 것보다는 밖에 나가 사람도 만났으면 하는 마음에 외출하려는데 어머니가 자꾸 어깃장을 놔서?
비슷한 일은 그 후로도 많이 일어났다. 정말 무수한 갈등과 싸움을 하면서 나는 어이없는 황당함도 느꼈고, 어머니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떤 때는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고, 어머니의 심정이 이해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어머니는 아들이 안타까운 거라는 걸.
내가 제대로 쉬지도 못하면서 당신을 돌보는 게 안타깝고, 혹시나 업무에 지장을 주진 않을까 하는 안쓰러운 마음이었다. 그렇게 복잡한 마음이 읽히고 설켜 본인도 모르는 감정이 어느 순간 튀어나오곤 했다. 어머니의 ‘그릇’은 아직 그 죄책감을 모두 담아내기엔 너무 버거웠다.
어머니의 불안을 확인한 뒤, 나는 원활히 소통하는 법을 배워 나가기로 했다. “엄마, 엄마가 나한테 미안해하는 거 알아요. 그런데 엄마랑 나가서 산책하는 거 내가 정말 좋아서 하는 거예요. 엄마랑 함께하는 시간이 소중하거든.” 그러자 어머니 역시 달라졌다. 이제는 농담으로 건네는 어리광도 웃으면서 받아치실 정도다.
“엄마, 내가 오늘 엄마 병원 모시고 가려고 새벽 6시 반에 나와서 대기표 뽑아 온 거 아셔요?” “그럼 세상에 아들이라고는 너 하난데! 그걸 네가 해야지, 누가 하니?”
불평이나 억울한 마음 없이 기꺼이 도움을 주고, 그 도움을 달갑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돌보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 모두가 행복하다. 어머니는 나의 돌봄과 도움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자, 마음이 편해지셨다. 우리 사이에 더는 정서적인 다툼이나 충돌이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